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롱 Aug 05. 2022

괴짜들의 음악 <프랭크>

프랭크는 괴짜지만 믿을 수 있어?

'프랭크는 괴짜지만 믿을 수 있어.' 프랭크를 우상으로 삼았던 밴드 멤버 중 한명이었던 돈이 존에게 한 대사다. 마침표를 물음표로만 바꾸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대중성의 상징 *존과 충돌하면서 정체성이 뒤틀린다. 프랭크의 심경변화로 모든 것이 무너진다. 취향을 떠나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싶은 인간의 ‘사회성’ 욕구가 여기서 드러난다.

하지만 당연하고 야속하게도,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은 대중적인 음악이 될 수 없다. 모든 게 완벽한 천재의 이미지였던 프랭크는 사회에 나오면서 순식간에 망가져 버린다. 공연 관계자 앞에서 말을 더듬고, 어수룩한 사람으로 추락한다.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존이 말한 ‘영상 조회 수’라는 대중적 숫자에 갇혀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프랭크는 먹을 때도, 씻을 때도 벗지 않던 그의 '정체성'인 가면에 분장까지 해버리고 만다. 프랭크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름도 미국에서 흔한 ‘존’으로 지은 것 같다. 한국으로 따지면 민수, 준호 정도. 



홀로 정의된 것이 많은 사람: 존

음악의 열정보단 대중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존의 특성은 유튜브와 트위터를 이용해 기록을 남기는 모습으로 살펴볼 수 있다. 초반부 존은 무료한 일상에서 홀로 작곡하고, 노래하고 싶어 하는 음악의 열정이 강한 사람으로 드러난다. 홀로 글을 자주 남기는 탓에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정의된 키워드들이 많다. 스스로의 가치관과 대중의 반응에 갇혀 사는 사람이다. 존은 밴드보다 기록을 중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중적과 국소적인 대립된 두 일상에 놓인다. 밴드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열등감을 느낌과 동시에 비상금을 탈탈 써버릴 만큼 중요하다. 모순적이다. 대중의 관심을 위해 밴드의 모습을 SNS에 올리지만, 정작 그들의 연대는 쉽게 받지 못한다. 애완동물로서는 많은 수로 존재하지만, 야생에서는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친칠라’처럼 존은 SNS라는 가상의 수에 집착하며 친칠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소파 보풀의 나이

숲속에서 모든 것이 완벽해보였던 ‘프랭크’도 도심에 놓이자 겁먹은 친칠라가 되는 것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음악과 인물들도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정의하더라도 대상의 본질이 아닌, 숲속 혹은 도심 등의 상대적인 정의일 것이다. 씨네21 주성철 편집장의 평론처럼 <프랭크>는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의’ 연속이다. 짧은 영화임에도 뒤틀린 모순점이 너무 많아 마지막 프랭크가 밴드를 다시 찾아가 메탈 음악을 펼칠 때까지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첫 씬의 존과 함께 깔린 발랄한 실로폰 배경 음악은 온데간데없다. 자신의 정체성조차 찾지 못한 인간 ‘프랭크’가 소파에 한줄기 튀어나온 보풀의 나이를 논하며 연민하는 모습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프랭크는 괴짜지만 믿을 수 있’었던 돈의 자살, 원하지 않는 것을 노래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다양한 음색 등의 이질성은 과연 행운일까?


<프랭크> 속 음악은 주된 역할을 하는 음악 영화라기 보단 인간의 정신을 더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배경음악' 영화 정도로 정의하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음악은 그들을 대변하는 요소일 뿐이고, 그들의 서사가 결국 음악이자, 서사일 터이니.

작가의 이전글 믿을 수 없는 세계와의 연결, <컨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