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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롱 Aug 12. 2022

나에겐 불친절했던 <친절한 금자씨>

그해 가을엔 물방울 무늬 원피스가 유행했다

눈으로 시작해 눈으로 끝나다

  금자가 출소하는 첫 씬에 눈이 내렸고, 마지막 씬이었던 금자의 집 앞에서도 많은 눈이 내렸다. 영화는 눈으로 시작해 눈으로 끝났다. 두부 역시 첫 씬과 마지막 씬 모두 등장했다. 이는 모두 흰색이며, 출소 후 두부 먹기를 거부했던 금자는 스스로 만든 두부 케이크에 비로소 얼굴을 파묻는다. 흰색은 순백,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뜻한다. 이는 금자의 금기 행동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복수가 끝난 금자는 딸 앞에서 케이크에 머리를 박는다. 감독은 흰색을 강조하기 위해 흑백으로 장면을 처리했다. 흰색은 흑백화면에서 강조되는 유일한 색이다. 금자의 살인을 기점으로 색조가 줄어들며, 마지막 씬에선 흑과 백만 가득했다. 일말의 죄책감 탓에 딸이 떠주는 케이크를 직접 받아먹진 못했으나, 스스로 얼굴을 묻으며 결말은 결국 흰색으로 가득 찬 것이다.



그해 가을엔 물방울 무늬 원피스가 유행했다

   올드보이 최민식에 이어 친절한 금자씨는 이영애의 영화였다. 타짜의 김혜수, 아멜리에의 오드리 토투처럼 친절한 금자씨는 이영애다. 대체할 배우를 쉽게 떠올리긴 힘들다. 이영애의 동화적인 딕션은 이금자가 벌이는 엽기적인 범죄 행각에 몰입을 가했다. 초반 10분가량의 나레이션과 이영애의 간증 연설은 블랙코미디 영화의 갈피를 잡아주는 적합한 요소다.

   캐릭터 이금자는 양면성이 뚜렷한 인물이다. 악이 가득한 교도소에서의 선행, 다른 교도수와 대조되는 상아색의 교도복, 예수에 기도하던 이금자가 동료 죄수의 법구경에서 구원을 받은 것까지 감독은 영화 내내 모순적이고, 반대되는 성질로 이금자를 표현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틀마저 희화와 범죄 사이를 넘나드는 대조적 구조를 이어갔다. 이건 이금자의 양면적 전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를 짓지 않음에도 죄를 받은 이금자, 더 나아가 복수를 결심했음에도 정작 살인에 가담하지 못한 것은 이금자의 모순적인 내면 요소에 물음표를 걸게 한다. 그것은 끝내 해소되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이금자는 변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양면적 인물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박찬욱의 영화로 대한민국을 바라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만으로는 감독 박찬욱을 깊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후에 영화 <올드보이>까지 감상했다. 영화 하나만 분석하기에는 색이 너무 뚜렷해 이 영화만 컨셉을 잡아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일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내자면 NO였다. 연작이었던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는 연출방식에 있어 많은 부분이 유사했다. 빠른 줌인과 클로즈업으로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극대화했고, 포인트 장면 때마다 등장하는 클래식 선율로 긴장감을 높였다. 2018년에 개봉한 범죄 영화 <굿타임>에도 이러한 기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보다 한참 앞선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는 지금 봐도 세련된 영화라고 평하고 싶다. 세련됨과 동시에 그 당시 한국 역사와도 직면하고 있어 박찬욱의 영화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막 산업화를 이루고, IMF 금융위기로 몰락했던 과도기의 한국, 1980-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가 대거 그렇다. 일본 버블경제에서 흥행했던 시티팝(City pop)처럼 특유의 시대적 감성이 강하다. 어둡고 강렬한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며, 시대의 향이 선명하게 베어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외쳤던 홀리데이 지강헌 사건을 떠올려보면 영화의 분위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연쇄살인, 폭행, 절도 등의 사건들이 언론과 만나 자극적인 황색 뉴스 보도를 마구 내뿜을 시절이었다.



복수혈전의 결말은 결국 이질감인가

  범죄는 복수와 결부되어 있다. 개별적인 인간에게 직접 가해지는 부정의(不正義)인 동시에 인륜과 연관된 전체적 침해이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은 주인공들에게 범죄를 범죄로 갚게 했다. 폭력적이고, 혈흔적인 발상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전개다. 약물, 도박, 비리 등 음지에서 조심스레 벌어지는 현 범죄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욱 일상적이고, 그래서 엽기적이다.

  복역을 마친 여죄수들의 사회생활도 생각보다 다양하다. ‘죄인’이었음에도 그에 관한 후회와 고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범죄를 심각하게 다루지도 않았다. 영화는 오히려 그들이 사회에 나온 후로 계속 잔혹해진다. 이런 분위기에서 의문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이금자는 청춘을 '범죄'에 바쳤다. ‘살아있는 천사’라고 불리며 그와 반대되게 15년간 복수를 계획해왔다. 하지만 정작 복수의 기회가 왔을 때, 금자는 피해자 부모들에게 맡겼다. 금자는 도대체 무엇을 거두었나. 웃는지 우는지 모를 알 수 없는 표정을 남기며 살인을 방관했을 뿐이다. 자신의 아이를 찾았기 때문일까. 이금자의 장기간 복수 프로젝트는 결국 방관으로 끝났다. 박찬욱은 살아있는 천사 이금자에게 과연 무엇을 선물하고 싶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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