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의 예술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사회적 규범을 어긴 사람들의 예술
범죄자와 관련된 영화는 악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그랬듯, 분명 사회적으로 약속해 놓은 법을 어긴 사람들임에도 후유증도 없이 모두가 잘 살아가고, 금자를 도울 능력이 된다는 것에 괜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나마 <친절한 금자씨>의 인물들은 실제 살아있는 사람도 아닌 시뮬라크르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실제 10년 이상의 형을 복역 중인 배우들로 구성돼있다. 우리는 실제 죄수들의 연기를 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실제로 연극을 연습하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도 않았다.
감독은 인물들을 미화하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했다. 다큐처럼 리얼하게 그들의 연기를 담았다. 죄목을 제외한 죄수들의 전사는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할 뿐이다. 또한 연습을 하는 곳, 연극이 끝나고 들어가는 곳은 모두 감옥이다. 감독은 그들이 죄인임을 끊임없이 되뇌게 만든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죄인을 옹호하거나, 이 사람들이 받은 형에 연민을 느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이 펼친 연극과 이 영화가 예술임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해당 소제목은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이며, 이 영화의 주제로 볼 수 있다. 연극의 대사보다도 죄수들의 사색에서 나오는 대사들이 인상 깊었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몇 안 되는 컬러 화면이다. 영화는 죄수들이 연극을 펼칠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흑백으로 표현된다. 컬러는 인물들이 죄수가 아닌 예술가일 때만 발현한다.
흑백은 빛과 어둠을 명확하게 강조하는 능력이 있다. 죄수들은 연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검정 옷을 입었다. 교도소의 밤도 칠흑같이 어둡다. 반면에 연극을 연습하는 광장의 배경은 눈이 부실 만큼 하얗다. 감독은 흑백을 통해 교도소와 연극의 대조성을 보여줬다. 흑색의 천장에 그리운 가족들을 떠올려보는 것이 전부였던 죄수들은 백색의 많은 조명 아래 자신을 잊은 채 연기에 몰두할 수 있는 예술인이 되었다.
영화 초반부 오디션 씬에서 죄수들은 슬픔과 분노를 연기한다. 오랫동안 천장관찰자였던 죄수들에게 슬픔과 분노는 최적화된 감정이다. 교도소에서 기쁨과 행복을 연기할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도 마찬가지다. 죄수들은 예술을 접하며 성장하지만, 긍정적인 감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성장이었다.
이 대사는 죄수들이 예술로 겪은 ‘변화’를 상징한다. 권태로운 수감 생활에 예술을 접하며 처음으로 성장이란 갈증을 느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대사를 외친 인물은 실제로 종신형을 받은 ‘코시모 레가’다.
줄리어스 시저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뤘다. 희곡의 배경은 격동하는 로마 공화정 말기다. 절대 왕권과 민주화라는 가치관의 대립으로 친한 벗을 배신하고, 혁명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어두운 내용이다. 이 연극을 통해 죄수들은 한차례 성장한다. 연기 도중 자신이 배신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현실과 비슷한 갈등을 연극으로 연기하며 쌓아왔던 분노를 해소시키기도 한다.
희극에서처럼 실제 인간은 다방면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죄인이지만 연기를 잘 할 수 있고, 연기를 못 하더라도 공감 능력이 뛰어날 수 있으며, 이것을 다 떠나 준법정신으로 한 평생 교도소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잘 하는 것과 잘 하지 않는 것은 동시에 존재하고, 모든 인간들의 능력과 그에 따라 경험하는 상황이 다르다.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이런 인간의 특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치타는 빠르다, 기린은 목이 길다, 와 같이 인간은 하나의 특징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폭 넓은 생물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이러한 철학적인 물음도 관객에게 스스럼없이 던진다. 새옹지마성 죄수의 인생을 다룬다. 교도소에서 불행한 수감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죄수들은 이런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분석하고, 연기할 수 있었겠는가. 더불어 연기에 소질이 있고, 이 영화를 통해 자서전을 쓰거나, 배우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저는 몇 번이나 오늘처럼 무대에서 피를 흘려아 할 것인가?
절대 권력자였던 시저는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다. 결국 친구의 배신으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죽어서도 편치 않다. 시체는 무방비하게 광장에 놓이며, 살아있는 자들의 관념에 갇혀 선동의 대상이 될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연극을 하기 전 죄수의 삶도 그랬을 것이다.
시저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저는 로마 제국에 사회적인 틀을 만들어 통치했던 절대 권력자다. 사회적인 규율을 어겨 교도소에 들어온 죄수가 이런 시저의 역할을 하다니,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없다. 시저가 죽은 후, 세상은 요동쳤다. 온갖 발언과 선동이 남발했다. 대중들은 그것에 쉽게 동조했으며, 혼돈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저의 죽음보단 브루투스의 죽음이다.
양극의 인물이었던 시저와 브루투스의 죽음으로 나라의 미래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졌다. 실제 역사가 아니고, 희곡 이후의 이야기이니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그 둘의 죽음으로 세상이 변했고, 많은 가능성이 열렸다. 시저가 죽음으로써 죄수들은 이것을 연기할 수 있게 되었다. 시저가 죽지 않았다면 정녕 죄수들이 예술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까. ‘시저’를 인물로 정의하기 보단 그의 죽음으로 인해 펼쳐진 모든 영향력에 집중하고 싶다. 희곡 속 대사처럼 시저는 앞으로도 예술을 위해 계속 죽을 것이다.
다큐, 희곡, 영화
영화의 장르가 애매모호하다. 연극이 주가 되었으나, 준비하는 과정은 다큐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담은 것은 영화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등장인물들이 연극에 워낙 몰입해서인지, 이것이 연극인지 영화인지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장르가 모호한 이 영화는 결말도 모호하다. 흑백 가득한 교도소에서 연극은 컬러로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앞서 말한 대사는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남긴다. 연극이 끝나고도 최소 몇 년동안, 혹은 한 평생 여기를 나가지 못하는 죄수들에게 과연 희망찬 결말이라 정의할 수 있는가. 연출은 수미상관 구조를 이룬다. 연극의 끝이 영화의 시작이며, 영화의 끝도 연극의 끝이다. 남의 인생을 쉽게 정의할 수 없듯, 죄수들의 도전을 담은 이 영화도 쉽게 정의내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