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떼기만 먹어도 큰일이 안 나고 꽤나 즐겁습니다
왜 고기를 안 먹는지, 비건지향을 하게 되었는지 사람수만큼 다른 이유가 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동물권, 환경권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고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기도 한다. 내가 하는 이유는, 채식을 해도 큰일이 안 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종 꽤나 즐겁다는 사실도.
큰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내가 생각했던 두루뭉술한 큰일이란 무엇일까…
여러 조각으로 쪼개서 바라보기로 했다.
상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아마도 미각의 상실. 즐거움의 상실. 추억의 상실. 사회적 경험의 상실. 그런 것들일 수 있겠다. 엄마가 끓여주던 내가 참 좋아하던 소고기뭇국이나 다진 소고기를 밥에 넣은 김밥, 친구들과 즐겁게 많이 먹던 삼겹살, 나의 영원한 소울푸드였던 명동교자의 칼국수... 이 음식들에는 이야기와 삶의 조각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놓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이런 고민이 무색하게 새로운 소울푸드를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찾아내고 있다.
귀찮음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내가 좋아하던 신라면과 참깨라면을 저버리고 정면이나 채황 같은... 마트에는 잘 안 파는 비건라면을 찾아서 주문해야 하는 수고부터 시작한다. 즐겨먹던 짜장면이나 칼국수 같은 음식들은 어디서 비건으로 먹을 수 있나 다시 일일이 찾아야 한다. 이것 역시 처음에만 조금 수고롭고 그 후에는 그냥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다른 식재료 주문하면서 비건라면 사는 거, 맛있는 비건중식집 찾는 것. 정말 별일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바라보자. 일단 지인들에게 어디까지 안 먹는지 매번 새로 이야기를 해줘야 하며 친구들은 고기가 먹고 싶을 텐데 나 때문에 희생하는구나…라는 마음을 견뎌야 한다. 나의 우려에 반해 사실 모든 친구들은 나의 채식선언 이후 정말 대수롭지 않게 페스코/채식메뉴를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직접 겪기 전에는 아주 큰일처럼 느껴졌다.
막상 겪어보니 큰 파도처럼 보이던 일들은 한 번 부딪히고 나면 물보라처럼 작아지곤 했다. 삶에서 걱정하는 많은 일들이 겪어보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채식을 시작한 뒤 소소한 즐거움과 놀람이 있었다.
1. 주변인들의 변화 및 동화
사람들의 반응과 행동을 보는 것이 나는 퍽 재밌었다. 친구들이 부대찌개집에서 소시지랑 햄대신 두부랑 콩을 더 넣고 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본다던지, 아빠가(경상도 남자인 우리 아빠가!) 아빠는 국밥 먹고 싶지만.. 너는 못 먹으니까(‘안’이 아니고 ‘못’이라고 표현하신다) 함께 먹을 수 있는 다른 식당을 열심히 찾는다던지. 친구들이 내가 일하는 비건식당에 오는 것에 굉장히 설레는 마음을 비춘다던지. 나를 위해 1분 정도 더 고민해 주는 내 사람들이 한층 귀여워 보인다.
2. 새로운 생각과 경험
사찰음식과 만나다
채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후 당시 스웨덴에 살던 나는 한국의 채식음식이 궁금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는 곧 깨달았다. 우리나라에는 기본적으로 채식요리가 꽤나 많아서 따로 육식/채식으로 음식을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온갖 나물요리에 채소로만 만드는 국에 심지어 우리네 할머니들이 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채식 혹은 페스코 식단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만의 고유한 채식 식문화는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 내소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할 때 밥맛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하도 맛있어서 욕심을 부리다가 매끼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고 민망해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먹보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그만큼 고기도, 오신채도 없는 그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아! 한국의 고유한 채식문화중 하나는 과연 사찰음식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 한국에 가면 꼭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7월에는 드디어 한 달간 사찰음식문화 체험관의 여름수업을 들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 사찰음식은 맛있었고, 거기에 깃든 정신은 멋있었다. 그 후 나는 홀린 듯이 9월에 시작하는 초급사찰음식조리사 과정에 등록했다. (궁금하다면 향적세계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길) 네 번의 수업을 들은 지금의 나는 정관스님의 책도 함께 읽어가며 사찰음식의 세계에 더욱더 깊이 들어가려 하고 있다. 이 모든 건 채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아마 일어나지 않았겠지.
비건키친에서 일하다!
회사를 떠나 갭이어를 가지러 서울에 와서 여러 가지 배우고, 창작활동도 하지만 뭔가 2프로 부족했다. 그건 바로 사람들과 함께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동체에서 지내는 삶이었다. 물론... 가져온 돈을 다 까먹지 않기 위해서 일거리를 찾으려던 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래전부터 팔로우하고 있던 비건식당이 떠올랐다. 그들은 가끔씩 직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올렸다. 서울생활 초반에는 내가 무슨 키친에서... 하며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짓곤 했다. 하지만 7월에 사찰음식을 배우며 생각했다. 왠지, 이제는 지원해 봐도 되지 않을까?
나에 대해서 그리고 왜 거기서 일하고 싶은지 한 글자 한 글자 그 마음을 눌러 담아 쓴 지원서를 보냈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답이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현재는 두 달이나 근무를 했다. 다양한 프렙을 배우고 생전 처음에 해보는 플레이팅에 주문서관리에 정신이 없을 때도 많지만, 일하는 그 모든 하루하루가 정말 즐겁다. 생명을 해치지 않는 다정한 음식을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그 음식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들이 귀하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한 가지를 느꼈다.
채식은 뺄셈이 아니라 덧셈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채식은 내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하게 했고, 평생 가져갈 지식과 스킬을 배우게 했다. 삶에 모든 일이 그렇듯,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 감사하게도 채식을 하면서 나는 얻는 게 더 많았다. 앞으로는 또 어떤 상상치도 못했던 재미난 일이 내게 일어나고, 다정하고 좋은 친구들이 내 삶에 성큼 걸어 들어올지 알 수 없다. 맛있는 풀떼기만 먹는 내 삶.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