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만 공백의 거리

창작 SF 단편 연재소설 《플랑크의 미아》

by 하선

아래로 아래로, 그저 내려가기만을 거듭하던 정윤의 손가락은 공지문의 맨 끝에서 드디어 멈추었다. 정윤의 심장도 그와 함께 멈추는 듯했다.


「분야 융합 부문 최종 합격자 : 지원번호 KR55112102 하정윤」




우주 시대가 열리고 타행성 테라포밍 사업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범국가적 연합 국회를 설립한 것도 벌써 190년 전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화성과 금성, 목성과 달을 비롯한 크고 작은 행성과 위성들이 사업의 대상이 되어 왔고, 지구의 영역은 성공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신(新)행성 후보 'TR1612'는 해왕성 외곽의 카이퍼 벨트에서 새롭게 관측된 천체로, 발견 위치로만 보면 과거의 지구인들이 '행성 조건 미충족 사유'로 갑작스럽게 공식 태양계에서 배제시켰던 명왕성과 유사했다. 그러나 해왕성 테라포밍 사업단의 관측 결과 TR1612가 근방의 소형 천체들 사이에서 비교적 높은 중력적 우위를 가지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거 명왕성이 충족하지 못했던 궤도 지배 조건을 아슬하게 통과해 버린 것이다.

새로운 행성의 등장 소식에 전 지구인들은 물론, 가까운 화성과 금성에 이주해 살고 있는 정착민들의 관심까지 주목되었다. 언론과 방송계는 그곳이 지녔을 미지의 가능성과 광대한 에너지원, 혹시 모를 토착 생명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 시종일관 떠들기 시작했다. TR1612는 한동안 각종 모임의 분위기를 뛰우는 단골 소재가 되어 있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은 딱 하나였다.


"그래서, TR1612가 진짜로 행성이 맞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답변의 키를 쥐고 있던 해왕성 사업단은 이미 맡은 본업, 즉 해왕성의 테라포밍 업무 스케줄 이행에만도 시간이 부족해 허덕이고 있었다. 게다가 수많은 중소 천체들이 군집해 있는 카이퍼 벨트는 늘 혼란했고, 혹시나 운이 좋아 더 구체적인 관측에 빠르게 성공한다 쳐도 그 소식을 지구까지 보내 소통하는 데엔 또 다른 수개월이 걸릴 터였다. 무엇보다, TR1612에 대한 조사는 해왕성 사업단의 의무 또는 책임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고위 정치권, 금융권 인사들이 서둘러 추진시킨 게 바로 이 '신(新)행성 후보 TR1612 탐사-테라포밍 사업'이었다. 당장의 선거와 주식 차트가 중요한 그들에게, 수년 후에나 밝혀질 TR1612의 정체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지금 당장 뭐라도 추진시켜 일자리를 창출시킨 그 성과,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적 관심 흐름을 이용한 자본 증식이었다.


"뭐, 가 보면 알겠지."


정윤의 취직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작은 술자리였다. 이미 대학원 진학을 확정 지은 민재, 그리고 아직 구직 중인 세하가 정윤의 앞에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테이블 높이의 원기둥 모양 로봇이 다가와 머리(로 추정되는 곳) 위쪽 선반에 놓인 식기와 밑반찬을 건네주거나, 조리 기구가 달린 팔을 꺼내어 고기를 구워 주었다.


"맞아, 그리고 행성이 아니면 또 어때? 어쨌든 정윤이가 우리 중에 첫 취직 성공했잖아."

"그래도 이왕이면 행성이었으면 좋겠단 거지. 그게 더 멋지니까. 자, 짠!"


연신 축하주를 건배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정윤은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취직에 성공하며 하나의 관문을 넘었다는 기쁨도 잠시, 벌써 그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행성이고 자시고, 난 그 별보다도 내 정체가 더 의문이다. 거기 가서 도대체 내가 뭘 하게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지원 요강에 업무 영역 안 쓰여 있었어? 뭐라도 보고 지원서를 넣었을 거 아냐."

"너 직무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분야 융합 부문.

이름은 그럴싸한데, 도통 뭘 하게 되는 업무인지 알 수 없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정윤이 그나마 지원자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포지션이기도 했다. 다양한 분야를 이것저것 도전해 본 경험. 중간 정도의 깊이일지라도 넓게 쌓은 지식. 그것만이 그나마 밀어볼 수 있는 정윤의 장점이자 이 직무의 자격 요건이었던 것이다. 마치 대학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19세의 정윤이 멋모르고 얼렁뚱땅 지원해 합격했던 전공인 '융합실무학'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겪어본 대학이 사회의 연습게임 같았다면, 구직은 실전이었다. 우주선 조종학과를 나온 것도 아닌 정윤이 수습 조종사 포지션에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직무는 '융합실무학'을 전공하며 애매한 제너럴리스트로 살아온 정윤 앞에 놓인 단 하나의 선택지였다. 하지만 정윤이 이렇게나 운명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전공을 이미 4년간이나 공부했으면서도, 딱히 무언갈 배웠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막상 기회를 잡고 보니, 정윤은 산을 피해 가려다 오히려 안개 한복판에 발을 들여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개된 업무 영역 속 언어적으로 이해가 되는 문구는 딱 한 줄이었다.


「전문 분야 공백 발생 시 투입되어 업무 연속성 확보」


"야, 이거 슈퍼땜빵 업무네! 그냥 뭐든 할 사람 없으면 정윤이 네가 해야 된단 소리 아냐. 학교에서 우리 맨날 하던 거 아냐? 다음엔 나도 지원해 볼까? 큭큭"


원론적인 의미는 정윤도 물론, 이해하고 있었다. 세하의 말처럼 대학 생활 동안 지겹도록 거쳐본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문장이, 그녀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학생 꼬꼬마들이 모인 지구의 대학이 아닌, 미지의 천체에서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공백'이 발생하게 되는 걸까? 이 세상의 모든 분야 전문가를 싹 다 끌어모아 데려가면서, 해결할 수 없는 구멍이 과연 발생하긴 하는 건가? 어쩌다 그런 게 발견된다 쳐도, 전 세계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르겠다는 걸 채워 넣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일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직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내가?




민재와 세하에게.


함선에서 내려다보는 지구의 풍경은 역시나 아름다웠어. 세하는 달 여행을 좀 다녀봤으니 이해하겠지? 사실은 지구에서 비행기가 떠오를 때 느끼는 고양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막상 눈앞을 가득 채우던 푸른 하늘이 둥근 원반이 되고, 점점 손톱보다도 작아져 보이지 않게 되는 과정이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오더라. 너희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무서웠어.

절대로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끌어당기기만 하던 중력이, 어느 순간 탁! 하고 내 존재를 뿌리 채 뽑아 내팽개치는 듯한 경험.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잡지도, 막지도 않는 진공 상태에서 그 어디에도 발 딛지 못한 채 둥둥 떠올라 허우적대기만 하는, 그런 경험. 난 이렇게 새까만 공백 속에 던져진 내가 어떤 새로운 곳을 향해 출발했다기보다는, 어딘가로부터 또 멀어져 버렸구나 하는 기분만 더 크게 들었어. 끝없이 까맣기만 한 무중력의 공간을 지나는 경험은 나에겐 경이로움 보다는 아득함에 더 가까운 것 같아.

떠나온 지 아직도 2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앞으로도 4년을 내리 이렇게 이동해야 하다니. 4년이면 대학을 한 번 더 가고도 졸업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잖아. 그치만 여긴 교양 수업도, 동아리도, 기말고사도 없어. 4년 동안 계속되는 MT라고 생각해 봐. 이렇게 죽어있는 시간이 정말 내 인생에 도움이 될까? 뭐, 불만이 있는 건 아냐. 적어도 돈을 내는 게 아니라, 받으면서 보내는 시간이니까. 남의 돈 받는 일은 역시 쉽지 않다 싶어.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더 멀어지기 전에 너희에게 편지라도 자주 써야겠다 싶었어.


내 업무에 대해서는 의외의 곳에서 단서를 좀 찾은 것 같아.

아무래도 수년간 다닐 회산데 좀 자세히 알아가보자 싶어서 이것저것 자료 조사를 해봤거든. 근데 생각보다 재밌는 정보가 많더라고. 우리 회사 창립자, 구형민 회장이라고 들어봤어? 그 양반이 예전에 했던 발언 영상 같은 걸 찾았는데, '분야 융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꽤 길긴 하지만 흥미로워. 물론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싶긴 해. 어떤 부분은 궤변처럼 들리기도 하고. 뭐 그래도 이 포지션이 어떤 이유로 생기게 되었는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겠더라.


그리고 '구형민' 하니까 생각났는데, 내가 이 양반 이름이 너무 친숙해서 이걸 도대체 어디서 들어봤나 했거든. 근데 만나 본 적이 있더라고. 기억할 진 모르겠지만 너희도 마찬가지야. 우리 1학년 2학기 때 함께 들었던 산학협력 로봇 개발 프로젝트 기억나지? 그거 프로젝트 결과 발표날, 현장에 있었어. 가까스로 프로토타입 완성시켜 놨더니, 한숨 푹 내쉬곤 '고생하셨습니다' 한 마디가 다였지. 잘만 하면 인턴쉽으로 전환시켜준다고 해서 나름 열심히 했던 것 같는데, 아무 소식 없어서 아쉬워했던 게 확실히 기억나.

물론 그 프로젝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워낙 우당탕탕이긴 했어. 로봇 개발은커녕, 아직 멍청한 전자레인지조차 만들 줄 모르는 융실과(융합실무학과) 1학년 꼬꼬마들 데려다가 앉혀놓고, 그 때 한참 유행하던 '소셜 돌봄 로봇' 같은 걸 만들어오라고 했으니 말야. 덕분에 한 학기 내내 로봇의 ㄹ부터 시작해서 겨우 기초 쌓고 숨 가쁘게 달리느라, 수명이 한 5년은 줄었던 것 같아. 결국 그렇게 나온 결과물도 생김새를 제외하곤 기성품 성능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망작이었지만.

그 회장 양반, 그 때 분명 아주 불만족스러워 보이긴 했지. 근데 대기업 회장쯤 되어가지고, 자기 눈높이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싶었으면, 이런 건 애초에 로봇공학과에 가서 주문했어야 하는 거 아냐? 개발 언어도 모르고 디자인 툴조차 쓸 줄 모르던 융실과 애들 모아놓고 한 학기만에 뭐 얼마나 더 완벽한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었겠어. 뭐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 솔직히 나는 장학금 준다길래 그냥 한 번 해봤던 거라 그다지 큰 열정도 없었지만.


근데 웃긴 건, 이 영상을 보고 나니까, 그 때 그 양반이 바랬던 건 '완벽한 프로토타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세상에 기성품 수준의 완성도를 가진 돌봄 로봇은 이미 충분히 많았으니까. 완성도는 떨어져도 뭔가 새로운 게 나오길 기대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한들, 로봇의 구동 원리부터 이해하기에 급급했던 우리가 그런 기대감을 충족시킬 만큼 대단한 걸 만들진 못했겠지만 말야.

영상 링크를 첨부해 줄 테니까 시간 날 때 한 번 봐 봐. 어쩌면 우리 학과도 이 직무랑 똑같은 목적으로 기획된 건지도 몰라. 다른 건 몰라도, 이름에 '융합'이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사용되긴 하니까.

뭐, 근데 설마 그게 진짜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4년 간 배웠던 걸 생각해 보면... 아마 우린 실패작이겠지. 학교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거라곤 기껏해야 냅다 현장에 던져놓고 '일단 해봐라, 그럼 뭐라도 배울 것이다' 한 게 전부니까. 그래도 그 쌩고생을 함께 한 덕분에 너흴 만났으니, 감사했다고 생각해야 하려나?


여기 사람들은 신기해. 횟수가 몇 번 되지는 않지만 여기도 신입사원 교육이 있거든. 몇몇 경력자 분들이 와서 강의를 해주시는데, 햇병아리처럼 앉아있는 우리들과는 살아온 세계가 다른 것 같은 아우라가 느껴져. 역시 경력자의 눈동자는 좀 다르구나 싶고. 그래도 첫 한 달 정도는 이런 교육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있었다 보니깐, 서로 뭐 입사동기네 뭐네 하면서 함께 어울리게 된 직원들도 있었어. 대체로 이번 출정이 처음인 신입들이라, 어느 정도 말이 통하니까 친해지기 좋더라. 시도 때도 없이 만나 수다도 떨고 밥도 같이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그런 건 대학 새내기 때랑 똑같았던 것 같아. 그런 자리에 끼게 되면 재미있긴 했어. 시간도 빠르게 가고, 즐거웠어. 너희 만한 친구는 결국 못 만났지만.

각자 소속된 부서가 다르다 보니까, 아무래도 어느 순간 대화에 한계가 느껴지긴 하더라고. 대학 땐 학과에서 누굴 만나든 관심 분야가 대체로 비슷하니 함께 즐길 것도 많았고, 다들 아는 것도 거기서 거기니까 멍청한 장난을 치면서도 깔깔 웃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어쩐지 한 번씩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벽이 느껴지곤 해.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무슨 말인 지 알아듣기 어렵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어색한 공백이 끼어들면,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쉽지가 않아. 사람들은 참 좋은데 말야. 무슨 기숙사 생활 하는 것처럼 매일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살다 보니까, 날이 갈수록 그 벽이 더 많게, 그리고 높게만 느껴지더라고. 심리적 거리가 물리적 거리와 꼭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지구에서 만났더라면 조금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었을까?


이 함선 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쉽지가 않은 것 같아. 뭐든지 가까워지는 건 너무 어려운데, 멀어지는 건 한 순간이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너희들로부터 1초, 2초, 3초만큼 멀어지고 있어.

2년이 지나 절반이라는 분기점을 넘기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지는 걸까? 그 때도 지금처럼 내 눈앞에는 새까만 우주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냥 눈 감고 귀 막은 채 앞으로 3년 하고도 10개월 동안 이쪽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행성이 떡 하니 보이게 되면, 그 땐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걸까? 이 긴 공백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잘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아마 나는 매일을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으로 살아가겠지.

지난 2개월처럼, 그리고 오늘처럼.


- 2개월만큼 멀어진 정윤이가.








플랑크 (Planck) :
현대 물리학에서 자연이 허용하는 물리량의 기본 척도를 규정하는 개념. 길이와 시간, 에너지를 의미를 잃지 않는 범위에서 가장 작게 쪼갰을 때 도달하는 스케일을 의미한다.
플랑크 스케일 안쪽으로 접어드는 미시 영역에서는 시공간의 연속성이 붕괴되며, 기존의 확립된 물리 이론들은 더 이상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 영역을 과학계에서는 현대 물리학의 이론적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2화 끝]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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