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SF 단편 연재소설 《플랑크의 미아》
다섯 평이 채 되지 않는 어두운 방의 벽면 한 켠, 작게 나있는 창 밖으론 새까만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그저 고요하기만 할 뿐인 우주 함선 속 한 공간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수많은 별들은 그 자리에서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채, 그대로 작게 빛나고 있었다. 위잉 하며 울리는 낮은 엔진음 소리를 제외하곤, 그 어떤 신호도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거대한 함선이 설마 고장이 나진 않았을 거라고, 누군가 분명 방향키를 제대로 쥐고 계속해서 악셀을 밟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그저 믿는 수 밖에는 없었다.
투박하게 놓인 일인용 책상에는 종이와 펜들이 굴러다니고, 펼쳐진 노트엔 낙서처럼 보이는 필기들이 가득했다. 그 위로 겹쳐져 보이는 여러 장의 홀로그램 화면들. 자동 재생되는 플레이리스트처럼 한 장 한 장 넘어가던 화면 속에서, 어떤 남자가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화성과 금성에 사람들이 정착한 지 벌써 17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제대로 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죠? 옛 지구에서라면, 말 한마디로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미국 같은 나라가 장성하고도 남았던 시간인데 말이에요...
아, 혹시 여기 [황산하다]라는 표현의 의미를 아는 분이 계십니까? 사용된 단어, 발음, 문법 모두 분명 지구어인데, 도대체 무슨 뜻으로 쓰이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즘 애들 신조어냐고요?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건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수십 년째 사용되어 온 공용 표현입니다. 우리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왜냐, 오직 금성에서만 쓰이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하... 놀랍지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요? 저도 잘 모릅니다. 설명이야 충분히 들었죠.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질 통 모르겠어요. 금성에서만 생긴다는 특이한 기상현상과 관련된 은유적 표현이긴 했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이건 금성에서 진득하게 좀 살아봐야 이해할만한 영역 같아서, 더 자세히 묻지도 않았어요. 이미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어 버리기도 했구요. 분명 과거 언젠가엔 그 뿌리가 지구에 있었던 이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가보시면 말이죠, 귀에 들리는 대화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그 언어의 문법대로 흘러가는데도 그 뜻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아요. 그 상태로 한참 머물다 보면, 어쩐지 바다에 홀로 떠있는 외딴 섬 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다. 씁쓸한 사실은요, 방금 그 문장을 들으면 금성인들도 마찬가지로 답답해할 거란 겁니다. 그곳엔 바다가 없으니, 섬이란 게 무엇인지 이해시키려면 한참 걸릴 테니까요. 금성을 예로 들었지만, 화성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어쩌다가 이렇게나 행성들 간 간극이 벌어진 걸까요? 멀어서? 서로 떨어져 산 지 오래되어서? 아님 단순히 그냥 관심이 없어서?
오늘 기준, 지구에서 금성까지 9일 안팎, 화성까지는 장장 17일이 걸리지요. 이 시간을 줄여 나가기 위해 우리 지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자와 에너지원, 기술력을 발굴해 왔습니다. 발 디딜 땅조차 존재하지 않는 가스 행성인 목성과 토성, 천왕성과 해왕성에 진출하기 위해 말도 안 될 만큼의 노동력과 시간을 갈아 넣은 것 역시, 모두 그놈의 에너지원들을 얻기 위함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지금이 어떤 시대가 되었습니까? 지구 공항에서 출발해서 달까지 단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기적적인 시대에 도달했죠. 최초로 달에 도착했다던 아폴로 11호가 지구를 떠나 달 표면에 발을 내딛기까지 총 76시간이 필요했다는 역사를 떠올려보면 말이죠... 인류의 과학 기술은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속도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어느 순간부터 지구-달 간극은 더 이상 좁혀지지 못하고 있어요. 고작 그 두 시간의 벽을 허물지를 못하는 상태로, 수십 년이 지나 버린 겁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뎌진 지 오래입니다. 이 태양계 안에서 우리가 아직 발굴하지 못한 새로운 에너지원과 기술력은 존재하지 않아요. 혹시 있다고 한들, 수백광년 멀리에서 우릴 비웃고 있을 겁니다. 우린 이쯤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시간의 간극은 더 이상 유의미하게 좁혀지지 않아요. 플랑크 단위계, 그러니까 마치 더 이상 나뉘어질 수 없을 만큼 아주 작게 잘린 사과 같은 겁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목토천해의 기적 덕분에, 그나마 사과를 이 정도까지 자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나마'라는 표현은 좀 잘못되었네요. 바로 그 성과들 '덕분에', 이런 대우주 시대가 열릴 수 있었던 거지요! 일반 직장인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금성 여행 정도는 다녀올 수 있는, 그런 시대가요. 물론, 황금연휴에 일 년치 연차 휴가, 쌓아둔 장기근속 휴가까지 붙여 만든,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몰빵 해야겠지만요.
자, 거두절미하고,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질문은 이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더 발전할 수 있느냐!',
'과학 기술의 발전은 정말 끝나버린 거냐!'.
결론 먼저 말씀드리면요, 아뇨, 과학 기술의 발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예? 앞엔 다르게 얘기하지 않았냐구요? 하하... 네, '새롭게 발굴할 기술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술의 발전이 끝난 건 아니란 얘깁니다.
다들 아실 만큼 아시는 분들이 모이셨으니, 돌려 말하긴 그만할까요? 수십 년 간 이어진 이 '기술 절벽' 문제의 해결책, 저는 그게 '융합'이라는 키워드 속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발전할 때까지 발전한 이 과학 기술력이란 걸 더욱 응용하고, 더더욱 활짝 꽃 피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수학, 언어학부터 시작해서 분자물리학이며, 우주항공시스템학이며, 행성정치외교학이며, 화성사회학이며... 이 세상엔 수많은 학문들이 존재하고, 각 분야는 우리 인류가 살아온 수 천년의 세월만큼이나 깊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바로 이 '학문의 깊이'.
이게, 우리가 맞닥뜨린 기술 절벽의 원인입니다.
공부에는 끝이 없다고들 하죠. 한 사람이 죽기 전 각자의 분야를 전부 마스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 가까이에 닿은 학자분들이 계신다고 한들, 그분들은 뭐랄까요...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시민보단, 산속의 도인에 가깝달까요? 쉽게 말해, 사회의 틈 속에 숨은 채 우릴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을 인식해 내고, 그걸 멱살 잡고 끌어내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또 해결책까지 제안할 수 있는! 그런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 제가 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했군요. 그런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단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들은 그런 분들이기에, 수 천년을 압축한 하나의 학문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를 수 있었던 거니깐요. 다른 겁니다. 틀린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분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종류의 사회 구성원입니다. 각자의 전문 분야라는 산속에 파묻힌 인재들을, 우리 세계와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융합형 인재 말입니다.
좋은 질문을 던져야, 좋은 답변이 나오죠. 우린 여태껏 대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을 통해, '좋은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잔뜩 양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는 너무 정직한 속도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죠. 한 사람의 인생을 가뿐히 뛰어넘길만큼 쌓여버린 학문의 깊이는, 그들에게 현실 사회를 위한 질문을 던질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아요. 이젠 그들에게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조력자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분야 별 전문가들만큼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들의 언어로 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분야 이해도!
하지만 어느 한 분야로 치우치지 않고 각계의 정보를 공평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그 모든 지식들을 엮어 현실 세계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기상천외한 방안을 제안해 낼 수 있는 창의성!
여러분, 앞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는 이 삼박자를 모두 갖춘 '분야 융합형 인재'가 이 세상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어줄 겁니다."
정윤은 벽에 붙은 공지문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홀로그램 화면으로 된 이 공지문들이 벽에 고정된 상태라고 보긴 어려웠으므로, '붙어있다'라기보다는 둥둥 떠있었다. 개념적으로는 '떨어져 있다'에 가까웠지만, 알림 공간으로 지정된 벽 위에 모여있으니 대충 붙어있는 모양새로 보이긴 했다. 더 빨리 더 많이 눈에 띄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면서도, 그저 붕 떠있을 뿐이었다. 마치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처럼.
개중 몇몇 제목이 정윤의 눈에 들어왔다.
「지구 지질 탐사 봉사활동 참가자 모집」
「행성 정치외교 모의국회 동아리 신입 부원 인터뷰 대상자 공지」
「우주항공모함 부품 디자인 공모전 당선작 발표」
"이야, 이런 걸 진짜 하는 애들이 있구나. 대단하네..."
모두 정윤이 찾던 제목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페이지들을 넘기며 공지문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왠지 모를 초조함이 쌓여 올라왔다.
지질 탐사는 아마 서호나 윤재처럼 하루 종일 흙만 파서 밤새 연구해 대는 흙 덕후가 갔을만한 거고, 행성 외교 모의국회는 이미 화성과 금성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지현이 같은 애 말곤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없다. 우주선 부품 디자인? 저건 4D 서라운드 뷰 모델링 프로그램 구동에 능숙하거나, 최소 어릴 때 행성 여행을 많이 다녀 우주선을 타본 경험이 있는 애들이어야 뭐라도 해낼 거다. 무슨 부품이 어디에 필요한 건 진 알아야 뭘 해보든 말든 하지. 일단 나는 아니야.
모르긴 몰라도 서호나 윤재, 지현이는 저런 대외활동쯤은 이미 3학년 전에 다 마쳤고, 지금쯤 노벨상을 몇 개 받은 연구소나 행성 정책 위원회, 고연봉 대기업 같은 곳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했겠지. 나는 과연, 이들처럼 어떤 분야에 대한 적임자로서 누군가에게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사람일까? 아니, 지금 당장은 일단 아닌 것 같은데, 앞으로 좀 더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걸까? 근데 언제? 이제 진짜로 대학 졸업이 코앞인데?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머릿속을 메워가던 생각들을 애써 휘젓던 정윤이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찾던 그 공지문이 눈에 들어왔다.
「신(新)행성 후보 TR1612 탐사-테라포밍 함선 신입 인재 공개채용 결과 발표」
심장 소리가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공지문을 내리며 '하정윤', 딱 세 글자를 찾고 있었다. 손 끝 사이로 수많은 부문들이 지나갔다. 우주선 수습 조종사와 승무원, 기관실 정비사 보조와 같은 항공모함 용역자부터 지구 식물 배양, 동식물 먹이사슬 조율, 토양 별 농작법 연구, 우주 기상학과 행성 관측까지. 리스트는 테라포밍에 필요한 각종 전문 기술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래로 아래로, 그저 내려가기만을 거듭하던 정윤의 손가락은 공지문의 맨 끝에서 드디어 멈추었다. 정윤의 심장도 그와 함께 멈추는 듯했다.
「분야 융합 부문 최종 합격자 : 지원번호 KR55112102 하정윤」
플랑크 (Planck) :
현대 물리학에서 자연이 허용하는 물리량의 기본 척도를 규정하는 개념. 길이와 시간, 에너지를 의미를 잃지 않는 범위에서 가장 작게 쪼갰을 때 도달하는 스케일을 의미한다.
플랑크 스케일 안쪽으로 접어드는 미시 영역에서는 시공간의 연속성이 붕괴되며, 기존의 확립된 물리 이론들은 더 이상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 영역을 과학계에서는 현대 물리학의 이론적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