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분 19초의 유예 기간

창작 SF 단편 연재소설 《플랑크의 미아》

by 하선

그냥 눈 감고 귀 막은 채 앞으로 3년 하고도 10개월 동안 이쪽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행성이 떡 하니 보이게 되면, 그 땐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걸까? 이 긴 공백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잘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아마 나는 매일을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으로 살아가겠지.

지난 2개월처럼, 그리고 오늘처럼.


- 2개월만큼 멀어진 정윤이가.




::: TR1612 프로젝트 개시 140일 후, 탐사선 헤르메스호


정윤은 모처럼 아침 일찍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끝없는 자료 조사와 무의미한 업무일지 작성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형식적인 주간 면담을 제외하면, 딱히 할 일도 없는 함선 생활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 무려 한 달 만에 잡힌 신입사원 교육일이었다. 창 밖에는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이던 목성의 풍경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무언가 앞날에 도움이 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정윤은 설레고 있었다.

함선에 오른 후 초반 몇 주 동안만 해도, 분명 정윤은 그녀의 새로운 타이틀이 될 '분야 융합 인원'의 정체에 대한 불안감에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막상 모든 게 시작되고 나니, 생각보다는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정윤의 예감 중 딱 하나는 정확히 맞아떨어지긴 했다. 그녀에게는 명확하게 주어진 업무가 없었다.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함선에 오르게 되면, 분명 승선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업무들이 매일 몰아치며 숨통을 죄어올 줄 알았건만. 정윤의 일상은 고요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다.


"저기 저 태양 보이죠? 저기서 지구까지의 거리를 1AU라고 부르는데요, 이게 얼마나 먼 거냐면, 빛의 속도로도 장장 8분 19초 동안을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예요."


가끔 찾아와 쓸데없이 말을 거는 입사동기 석준이었다. 재잘재잘 말이 많은 그가 귀찮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그를 적극적으로 피할 만큼 바쁘게 할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현상이 뭘 의미하는 줄 알아요?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태양이 펑 하고 사라져 버려도, 지구에서 8분 좀 넘는 시간 동안은 푸른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는 얘기예요. 태양이 마지막으로 쏘아 올린 강렬한 빛을 오롯이 받으면서."

"뭔가 절망적인데요?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좀 낭만적으로 접근하면... 8분 19초의 유예 기간 같은 거죠. 짧게나마 남은 시간을 만끽하라는.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죠?"


유예 기간. 그거였다.

정윤은 매일 밤, 또 하루를 유예받으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정윤에게 그 유예 기간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부여된 이 유예 기간이 과연 8분인지, 1주일인지, 4년인지조차 모르는 채, 정체불명의 위기로부터 도망치며 얻어내는 불완전한 자유. 흐르고 있는 시간을 따라 일단 계속 달려보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오직 분명한 것은, 이 유예 기간이 언젠가는 끝나버린다는 사실뿐이었다.

끝은 끝이었다.

태양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곧 세상이 끝나버리는 것도 모르고,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8분 19초를 보낼 수는 없었다.

정윤은 곧잘 조급해지곤 했다. 나만 멍청하게 멈춰있다는 생각. 우주농작연구팀 유진님은 첫 주부터 연구실에 출근하면서 설거지라도 돕고 있고, 수송팀 우철님도 슬슬 사수분 따라 시범 운행 출격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만큼 고여있는 신입사원은 없어. 정윤의 주간 면담은 인사 담당자인 수연이 맡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도 그다지 오래 근무한 인원 같지는 않았다. 몇 주 전에 있었던 면담에서, 수연은 정윤의 질문에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들었다.


"정윤님 업무는요, 음, 사실 저희 입장에서도 조금 곤란하긴 해요."

"예?"


아무리 그래도 인사 담당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윤의 포지션이 파일럿 성격으로 이번 출정에 처음으로 생기게 되어 선례가 딱히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인 가이드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인사 업무라는 게 그렇거든요.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특정 필요에 따라 팀을 만들면, 인사팀은 그 목적에 알맞은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거죠. 그 팀 안에서 무슨 일을 할지는 보통 팀장과의 논의를 통해 정해 나가구요, 그 업무의 영역은 통상 저희가 개입하는 부분은 아니거든요."

"저는 팀장도 팀원도 없는데, 그럼 어떡하죠?"


잠시간 흐르는 정적. 수연의 안경 너머로 고민에 빠진 눈이 보였다.


"그건 제가 저희 팀장님께 보고를 좀 드려 보고, 다음 면담 때 다시 말씀 나누어보면 어떨까요?"


딱히 결말이 놀랍지는 않았다. 애초에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던졌던 질문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음 면담에서도, 그다음 면담에서도 수연이 정윤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함께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저 사람도 면담 대상자가 한 두 명이 아닐 텐데 얼마나 피곤하겠어. 정윤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정윤이 일간 자료 조사 업무에 파고들기 시작한 건 그즈음부터였다. 일간 자료 조사는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루틴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에 최소 할당량만 채우면 아무렇게나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정윤은 점점 하루 종일을 자료 속에 파묻혀 보내는 때가 많아졌다. 아무도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진공 상태에서, 뭐라도 배워두지 않으면 다른 동기들에 비해 뒤쳐질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 정보가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일단 머릿속에 넣어두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한동안은 '태양계의 행성 인정 기준'이라는 주제가 정윤의 관심을 끌었다.


인류가 가장 처음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천체는 당연히 달이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웠을 뿐 아니라 지구의 중력장을 기준으로 빙빙 돌고 있는 달은, 많은 부분에서 지구적인 조건을 맞추어나가기 편리했다. 그렇게 달은 금세 지구의 확장된 영토이자 더 넓은 우주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가던지, 달은 지구의 한쪽 팔처럼 움직이며 항상 곁에 있었다. 끔찍한 기후 조건을 가진 화성과 금성에 진출하기 위한 대기업들의 경쟁이 불붙었던 대우주진출 시대 초기에도, 달은 모두의 다음 스텝을 돕는 충직한 비서였다.

하지만 인류가 드디어 화성 진출에 성공했던 역사적인 그날, 인류는 달을 잊었다.

현시점 인류에게 가장 가치 있는 물자는 에너지원뿐이었다. 폭발적인 에너지원은 지구를 계속 가동하고 더욱 확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런 에너지원들은 보통 태양계 속에서 독자적인 중력 체계를 갖춘 별들, 즉, '행성'에서만 발견되어 왔다. 때문에 인류에게 있어 어떤 천체가 '행성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별. 행성이 아닌 천체. 예컨대 각 행성 주변을 돌고 있는 애매한 위성들은 빠른 속도로 존재감을 잃었다. 그들은 그저, 다음 행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딛는 편리한 발판 정도였다. 하나의 궤도를 지배할 만큼의 독자적인 중력장도, 무언가를 움직이거나 터뜨릴 수 있는 거대한 화력의 에너지원도 갖추지 못한 그들에 대한 취급은, 결코 그 한계를 뚫고 더 나아질 수 없었다.


정윤은 이따금씩 달이 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정윤은 3인칭의 시점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둥근 달이었다. 까만 우주에 홀로 떠있는 작은 위성. 매일 멈추지 않고 지구 주위를 돌고 있지만 결코 더 가까워지지는 못하는 새하얀 별. 그게 바로 그녀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윤의 우주에서 태양이 펑 하고 터져버렸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둠자락에 태양계가 차례로 뒤덮였고, 이내 그녀 역시 잠겨버렸다. 고작 8분 18초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곧이어 지구의 불이 꺼지기까지 딱 1초가 더 걸렸다. 정윤은 그동안 지구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시선은 분명 애정도 질투도 아닌, 그 중간의 어떤 것이었다.


1초 차이. 별 거 아닌 시간이었다.

하지만 8분 19초 속 1초는, 정윤에게 허용된 100년의 세월 속 73일이었다.




오늘만큼은 설레는 발걸음으로, 정윤은 서둘러 강의실로 향했다.

창 밖을 가득 메운 거대한 목성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멋진 강의실이었다.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 있던 신입사원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창가에 붙어 앉아 목성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목성은, 그 본체의 겉면에 거대한 땅 조각들을 껍질처럼 두른 화려한 모습이었다. 목성이 가스로 이루어져 발 디딜 땅 하나 없다던 이야긴 이제 옛말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 목성의 본체인 가스 덩어리는 마치 지구의 바다처럼, 그리고 그 위에 얹어진 조각들은 대륙처럼 보였다.

정윤이 조사했던 내용에 따르면, 그 대륙들은 실시간으로 각자의 위치를 인식하며 거리를 유지하는 강력한 능동 연결 체제 덕분에 서로 부딪히거나 부서지지 않은 채 가까스로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동 제어 시스템은, 목성 주변을 공전 중인 위성들에 실시간 통신 기지를 세워 만들어낸 첨단 과학기술이었다. 목성에게 90개가 넘는 위성들이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목성은, 4대 위성인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그리고 칼리스토의 제어 기지들이 사라진다면 수 시간 안에 무너져버릴, 극도로 불완전한 행성이었다.

그러나 이런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인류는 십수 년째 목성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역시나 에너지원에 있었다. 목성에서 추출되는 가스 에너지가 바로 인류의 우주 이동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준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 수급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인류의 우주 교통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강의는 이렇게나 대단한 목성 테라포밍에 참여했던 경력자들의 업무 경험 공유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므로, 정윤은 잔뜩 부푼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강의에 모인 교육생 역시 역대 비할 바가 없을만큼 많았는데, 무려 3백명이 넘는 신입사원들이 전원 집합한 것 같은 규모였다.


"오늘 첫 강의 누구였지?"

"아, 그 사람이잖아. 정부영 본부장. 테라포밍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나."


정부영. 정윤이 만남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물이었다.

행성 개척은 늘 10년에서 20년을 가뿐히 넘어가는 중장기 사업으로만 굴러가다 보니, 이직이나 직무 변경이 결코 쉽지 않은 분야였다. 한 번 사업이 시작되면, 지구로 돌아가기 전까지 함선 혹은 목적 행성에 갇혀서 회사가 짜놓은 순서와 방식대로 업무에 매진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부영은 달랐다. 분명 인류정착실 신입사원, 즉 말단 직원 수백 명 중 하나로 입사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구로 복귀했을 때 그녀는 행성 기술 경영 부문 전체를 이끄는 총괄 본부장이 되어 있었다. 전문 분야에만 매진해도 힘든 고속 승진을, 직무를 변경하고도 이루어 아주 특이한 케이스였다. 업계 소문에 의하면, 목성의 위성을 활용한 능동 제어 시스템을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 바로 정부영이었다.

정윤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희망이었고, 정부영은 그녀의 롤모델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목성과 4대 위성들의 콜라보레이션이 뿜어내고 있던 번쩍거리는 빛으로 온통 환하기만 했던 강의실이, 촤르륵 하고 커튼을 잡아끄는 소리와 함께 어두컴컴해졌다.


"이 업계의 첫 번째 규칙을 알려 드리면서 시작하죠."


마치 태양이 일순간에 사라진 것만 같은 어둠이었다. 단 1초의 유예기간도 없이.

목소리의 주인은 정부영 본부장이었다.


"저 창 밖에 펼쳐진 수억 개의 천체들. 저건 더 이상 보고 즐길 멋진 풍경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골칫덩이들일뿐이지요."


정적을 깨는 차가운 말에, 정윤의 마음은 삽시간에 땅바닥으로 내려앉았다.










[3화 끝]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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