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편의 사랑고백

그리운 그 시절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by 세헤라자데

사무실로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넘칠 듯 풍성한 붉은 장미꽃 바구니는 일순간 사무실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주책스럽게도 나는 나에게 온 꽃바구니가 아닐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배달 온 청년은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나를 무시하고 경리 보는 미스 김을 향해 “김 00 씨 맞죠?. 꽃 배달 왔습니다.” 한다. 당황한 듯 양쪽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미스 김을 보며 이십 대 초반의 싱그러운 젊음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요즘은 사랑 고백도 화려하고 거창하다.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인지 잘 포장된 모습들이 TV에 자주 등장한다. 늘씬한 키의 멋진 남자가 자가용 뒤 트렁크를 열고 예쁘게 포장한 장미꽃 다발을 꺼내어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건네주며 사랑을 고백하거나, 자동차 뒤 트렁크를 열면 다양한 색깔의 예쁜 풍선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데 “00야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라고 쓰인 현수막을 달고 있기도 하다.

어떤 연인들은 최고급 호텔 라운지에서 식사를 마친 후 와인을 앞에 놓고 준비한 반지를 주며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듣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추억이 만들어 지기를 원하는 것은 여성들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기억에서도 희미해져 버린 어느 일요일의 그날…. 고교를 졸업하던 해 2월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길 양쪽 노상에는 시골 할머니들과 장사꾼들이 물건을 팔고 있어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같은 고등부에 소속된 남학생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 아이는 타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주말에만 집에 왔기 때문에 서로 대면할 기회가 많지 않아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할 말이 있다는 그 아이가 갑자기 “너를 사랑해” 한다. 화들짝 놀란 내가 들고 있던 성경책을 떨어뜨리며 “뭐라고?” 하자 다시 “너를 사랑해” 한다. 평상시 말도 별로 없는 모범생이었던 그 아이의 황당한 행동에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성경책을 얼른 주워 들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놀란 가슴에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나는 친구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혹시 골목이나 길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날까 걱정스러워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데 길 건너편에서 그 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당황하기는 그 아이도 마찬 가지였나 보다. 두 사람 모두 놀란 가슴에 홍당무가 된 얼굴로 거리를 걷다 정면으로 다시 마주쳤으니…,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서울로 대학도 가야 하고 이것저것 급한 마음에 그렇게 고백을 하고는 자신도 너무 놀라 거리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남자에게서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시끌벅적한 시장바닥에서 들은 나나 고백한 그 아이나 순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냉정하게 거절한 나를 위해 그 아이는 좋아하는 마음을 가슴에 묻고 그 후에도 친구로 남아 나를 지켜봐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맙다.

내 친구 J는 배우 뺨치게 예쁘다. 예쁜 그녀를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지금의 남편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발한 행동으로 그녀를 감동시키곤 했다. 관사골이라 불리던 곳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J의 집 마당에는 담장을 따라 땅을 돋워 만든 작은 꽃밭이 있었다. 어느 날 그 남자는 J에게 전화를 걸어 화단을 파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가 담긴 박카스병이 묻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생일에는 커다란 유리병에 천 마리의 학을 접어 선물하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꽃을 보내는가 하면 친구인 나의 생일까지도 챙겨주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고백의 방법 중에서 닫혀있던 J의 마음을 가장 감동시킨 사연은 다른 곳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던 그녀는 새벽 6시면 버스를 타야 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새벽,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떨고 있던 그는 출근하는 그녀에게 수건으로 둘둘 말아 싼 물건을 건네주고 쓸쓸한 뒷모습을 남기며 발길을 돌렸다. 꽁꽁 언 몸으로 버스에 탄 그녀가 풀어본 수건 속에는 밤새도록 연탄불에 달구어진 주먹 두 개만 한 크기의 돌이 들어있었다. 직장으로 가는 춥고 낡은 버스 안에서 따끈따끈한 돌은 그녀에게 웃음과 함께 아직까지 식지 않은 그의 체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코믹스러운 모습들이지만 이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요즘은 싫다고 하는데 계속 따라다니면 스토커라고 경찰에 신고할 일이지만, 그 옛날에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남자는 온갖 정성을 들이며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고, 또한 여자는 내심 마음에 든 남성이 있다고 해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의 생각 때문에 금방 교제를 허락하지도 않은 시절이었다. 계속된 고백에도 마음을 열지 않던 그녀도 사랑의 돌 앞에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녹아버렸다. 지금 두 사람은 캐나다에서 아들 딸 잘 키우고 행복하게 늙어가고 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 시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 안에 또 하나의 내가 자리 잡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성을 만날 기회가 많아서인지 만나고 헤어짐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이 생각 또한 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들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을 테니까- Delete 버튼 하나로 쓴 글을 금방 지울 수 있는 스마트폰에 짤막한 문자로 자신의 마음을 보내는 인스턴트식 방법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몇 번 보고 마음에 들면 금방 사귀고 싫으면 또 어렵지 않게 헤어지는 연인들을 보면서 어리숙하지만 순수해서 낭만이 넘치던 이십 대의 그 시절이 그립다.

작가의 이전글한여름 밤의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