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앞에서 남편과 아들 녀석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굳이 아들아이를 앞세우고 목욕탕에 가길 원하는 남편과, 시험이 끝난 일요일 오후를 인터넷 게임으로 만끽하려는 녀석과의 불꽃 튀는 신경전 끝에 남편의 ko승. 우거지상이 된 아들과 흐뭇한 표정의 남편이 나란히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얼른 베란다로 나가 사이좋게 걸어가는 부자(父子)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창문을 때리며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뿌린다. 비에 젖을 두 사람의 걱정에 급히 우산을 집어 들다 심드렁해진 나는 우산을 제자리에 놓았다.
며칠 전 아들아이가 여행을 다녀왔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이었음에도 나는 아들아이의 방을 청소하고 책상과 서랍장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곤 내내 녀석을 그리워하며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제 중학교 3학년,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아직도 순진하기만 한 녀석은 지금껏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잘 자라 주었다. 늘 세상 여자들 중에 엄마가 최고인줄만 알고 자란 아이였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표현은 지나친 과장일까? 여행에서 돌아온 아들아이의 두 손에는 커다란 인형이 두 개 들려 있었다.
“엄마, 인형모양의 방석 하나 가격에 두 개를 준다고 해서 샀어요, 엄마 생각이 제일 많이 났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살게 없어서 못 샀어요. 엄마는 특별히 필요한 것도 없는 것 같고...” 하며 인형 방석 하나를 여동생에게 주고 다른 하나를 자기 방으로 가지고 갔다. 나는 그것을 제 의자에 놓고 쓸려는 줄 알았는데 다시 가방에 인형방석을 곱게 넣는 것이었다.
왜 포장을 다시 하느냐고 물었더니 녀석은 같은 반 여자 친구가 선물을 사다 달라고 해서 사온 것이라고 했다. 여자친구!!! 학교가 남녀공학이니 굳이 남녀 구별하지 않고 단순히 친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선물까지 챙겨온 아이를 보며 가슴 가득 섭섭함이 차올랐다.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들은 빼빼로 데이나 화이트 데이 때면 여자아이들이 주는 초콜릿이 너무 많아서 검은 봉지 두 세 개에 종류별 초콜릿을 가득 담고는 집에 오곤 한다. 그러면 “너는 주지도 않는대 이렇게 많이 받아오면 어떡하니?” 하면 “나는 초콜릿 주고 싶은 여자아이들이 없어요. 이 초콜릿 엄마 다 드세요” 한다 그러면 나는 금세 아들아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즐거움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던 녀석이 그 먼 곳에서 선물을 사오다니,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데 앞으로 수많은 나날들을 나 혼자만의 짝사랑에 웃고 울고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려움이 앞선다. 짝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것임을…,
만 하루 동안의 긴 산고 끝에 태어난 아들의 얼굴은 쪼글쪼글 하지도 붉은 색도 아니었다. 하얗고 둥근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은 열 달 내내 마음속으로 그리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잠시 전까지의 극심한 출산의 고통은 사라지고 엄마가 되었다는 뿌듯함만이 가슴속에서 벅차올라 숨이 막힐 것 만 같았었다.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웃음이 많았던 아들아이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말했었다. “지금은 그렇게 엄마 쳐다보며 방긋 방긋 웃으니까 좋지, 나중에 장가가서 자기 마누라 쳐다보면서 그렇게 웃어대면 아마 심술이 날 정도로 섭섭할 걸, 그러니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말아” 하던 말이 떠오른다.
친정어머니는 유달리 맏아들을 귀히 여겼다. 열아홉에 낳은 첫정이라 그런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맏이와의 정을 끊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시간들은 늘 아들의 시간에 맞추어져 있었다. 맏이의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어머니의 기쁨이고 슬픔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잘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던 내가 벌써부터 어린 아들 녀석의 여자 친구에게 질투심을 느끼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짝사랑에 갇혀 살고 있지 않을까.’
잠깐 동안의 단상에서 깨어난 나는 속 좁은 어미의 사랑이 결코 짝사랑이 아니길 바라며 우산을 집어 든다. 탯줄을 끊는 순간부터 시작된 이별,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될 이별연습에 지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저 만치서 비를 맞고 걸어가는 부자(父子)의 뒷모습에 나의 걸음걸이가 빨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