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늘의 교육' 2017년 11,12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하자센터 기획부장 아키(이충한)
akii@haja.or.kr
‘탈고용사회’와 미래지향적 진로교육
몇 달 전, 한 국제교류 행사에서 이 시대의 청년과 고용에 대해 짧게 발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년에 한 번 꼴로만 영어를 쓰는 입장인지라 어떻게 내 생각을 영어로 축약할 수 있을까 난감했다. 구글 검색창을 띄워놓고 잠시 씨름하다가 이내 ‘Post-Employment Economy’라는 용어와 만나게 되었다. ‘미래지향적 진로교육’의 당위성을 설명하기에 딱인 단어였다. 그동안 진로 관련 특강을 할 때마다 미래를 향해 생각을 뻗어보자는 의도로 ‘무업사회’나 ‘일자리소멸시대’ 등의 험악한 단어를 들이대며 겁을 줘왔는데, 조금 덜 선정적이면서도 더 강력한 용어를 찾게 되어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미래지향적 진로교육이라. 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에 ‘현재지향적 진로교육’이라는 말은 없다. 진로는 현재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 진로교육의 많은 전제들이 현재, 아니 과거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용사회’라 표현할 수 있는, 완전고용에 가깝던 시절 말이다. 반면 탈고용경제, 조금 확장하면 탈고용사회는 ‘고실업, 탈고용화 경향’ 정도로 온건하게 논의되던 판을 뒤엎는 단어다. 사회의 모든 자원을 ‘고용노동’을 통해 배분하던 방식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기본소득과 같은 ‘분배중심 경제체제’가 뜨겁게 논의되고 있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방향성에 동의하게 된 듯하다.
‘고용사회적 직업교육 시스템’, 그 이후
그래도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탈고용’이라는 단어 앞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울 수밖에 없긴 하다. 직업 교육부터 경제 시스템 전체가 생산노동 중심의 고용사회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인공지능’이나 ‘4차 산업혁명’과 같은 단어는 이 두려움을 불안증으로 확대시킨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해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심하게 불안해하면서도 해답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중산층 학부모들이다. 산업주의 시대 고용사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보통의 청소년들은, 그냥 외면하고 싶은 것 같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고, 현재만으로도 답답한 게 많으니 굳이 미래의 진로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선생님들도 걱정은 많지만 고민이 아주 깊지는 않아 보인다. 교실 안의 수많은 교육적 문제들에 비하면, 진로는 어찌 됐든 졸업 후의 일이니 말이다. 잠깐, 그런데 진로란 진짜로 졸업 후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고용사회적 직업교육 시스템’은 ‘선 자격 취득, 후 취업’이라는 프레임을 전제로 한다. 직능교육은 졸업 전, 진로개발은 졸업 후로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청소년이 고등학교나 대학교육을 마친 후에야 정식으로 노동현장에 투입된다. 배움과 탐색의 시간을 보장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착취적 노동현장으로 내몰리던 초기 근대의 청소년들보다는 나은 환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가 더 이상 안정적인 학교-일터 이행(school to work transition), 다시 말해 취업을 보장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 이 시스템은 파산위기에 놓였다.
고용이 불안정한, 혹은 불가능한 시대에는 스스로 진로를 항해(navigating)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진로개발은 대학 졸업 후가 아니라 모든 성장단계에 스며있어야 한다. 진로개발에 대한 개념 없이 주어진 공부만 하는 것은 운전을 하면서 목적지에 대한 생각 없이 가속페달만 주야장천 밟아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 전 타계한 앨빈 토플러가 2007년에 방한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10년이 지났고, 이젠 아무도 이 발언에 토를 달지 못한다. 알파고와 4차 산업혁명 열풍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지금의 교육이 (최소한 진로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이다.
미래 핵심 역량? 현재 핵심 역량!
조금 도발적으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런 주장이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사회에서 필요한 핵심 역량은 표준화되고 객관화된 지식을 프로세스 하는 능력이 아닌,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력 및 서로 다른 지식을 융합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사회가 제시하는 직업 중 하나를 골라서 그에 맞는 기술을 갖추는 것보다, 생애주기 내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가면서 스스로 학습해나가는 역량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미래 핵심 역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굳이 따지자면 이런 ‘미래’는 이미 오래전에 도래했다. 우리 사회가 따라가지 못했을 뿐.
비슷한 맥락에서 2015년에 청소년정책개발연구원에서 진행한 청소년 역량지수 개발 연구에서는 진로개발 역량을 ‘일생에 걸쳐 한 개인의 생애 역할, 경험, 관계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는 독특성을 개발하고 인생의 경험의 폭을 넓혀가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역량’으로 정의하고, 진로설계, 여가활용, 개척정신 등의 세부 역량으로 나누었다. 이 중 진로설계역량에는 자기이해, 진로 및 직업 탐색, 진로 결정 능력이, 여가활용 역량에는 여가 필요성 인식, 여가 자신감, 여가 몰입이 포함되며, 개척정신역량에는 차별화 태도, 도전정신, 위험 감수 등의 세부지표가 있다(진성희 외, 「청소년 진로개발 역량지수 타당화 연구」, 『한국 청소년 연구』 2015년 26호).
그런데 이렇게 많은 세부 역량 중에서, 근대적-산업사회적-고용사회적 직업교육은 ‘진로 및 직업 탐색’ 한 가지에만 집중해왔을 뿐이다. 그러니 그 한 가지가 무너지는 순간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패닉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교육시스템이라 해도, 위의 모든 역량들을 ‘수업’이라는 틀 안에서 교육시키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역량들이 일상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보면서 배우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수업이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커리큘럼화 된 진로교육 역시 청소년들의 진로개발 능력을 오히려 약화시킬 수 있다. 자유학기제 등을 통해 급격하게 늘어난 진로교육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학교 ‘밖’에 수많은 진로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지만, 구조화된 ‘프로그램’이라는 틀 속에서 일어나는 배움의 폭에는 한계가 있다. 단기 직업체험 프로그램의 과잉이 오히려 청소년들의 진로탐색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기도 하고, 진로와 직업 개념을 협소하게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다. 직업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현장에서는 이미 이러한 문제의식이 널리 퍼져 있다.
가장 좋은 진로 배움터는 ‘삶터’
그렇다면 진로교육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미래지향적 진로역량개발’은, 하버마스식으로 말하자면 도구적 합리성을 넘어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갖춰가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처럼 공식적이고 구조화된 ‘체계’뿐 아니라 조금 더 비공식적이고 비구조화된 ‘생활세계’적 영역에서의 경험들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진로교육’이라는 말은 절반쯤 역설이 된다. 진로역량 중 ‘삶’이라는 일상의 시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져야 할 것들을 제도 교육 안에서 학습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고용사회적 진로교육 시스템에서는 ‘자격 취득’이 중요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삶을 내비게이팅 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시대의 진로개발 역량을 기르기에 학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상적으로는 청소년들이 방과 후에 지역사회와 연계된 개인 혹은 그룹 활동을 하면서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 사회적 교섭능력을 갖춰가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지만, 일부 혁신학교나 대안학교, 커뮤니티가 살아있는 지역을 제외하면 청소년이 시민사회 영역에서 진로역량을 길러나가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의 비구조화된 일상적 형태의 진로교육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충분히 노력한다면 말이다. 그 첫걸음은 학교를 부분적으로라도 청소년들의 ‘삶터(생활공간)’로 인정하는 것이다. 충분한 ‘여가’가 보장되지 않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학교는 먹고 놀고 자는 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지점을 파고드는 순간 단조로운 정방형의 교실이 풍성한 삶의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하자센터에서는 2016년부터 ‘움직이는 창의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한 학급의 학생들과 학교 공간을 다시 돌아보고 변형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이 프로젝트에서 어린이들은 학교를 학습의 공간만으로 인식하지 않고 놀이와 휴식, 이해관계의 충돌과 의사결정행위가 일어나는 다층적인 공간으로 읽어내곤 한다. 혹자는 학교 리모델링 사업으로 보기도 하고, 외형은 디자인 싱킹 프로그램이나 커뮤니티 참여형 디자인 수업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린이들이 학교 공간을 사회로 인식하고 적극적 참여를 통해 개선시키면서 시민성을 기르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창의 클래스뿐만 아니라 씨앗학교, 공공 진로학교 등 수년간 학교 수업과의 연계를 통해 진행했던 장기 교육프로그램들을 돌이켜보면, 프로젝트의 성패는 늘 청소년들이 그 시공간을 (학교가 제공하는) ‘수업의 연장’이 아닌 (스스로 참여하는) ‘삶의 연장’으로서 받아들이는 데에 달려있었다. 프로그램을 학교 안에서 진행한 적도 있었고 하자센터에서 진행한 적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배움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위치한 시공간을 ‘삶터’라고 느끼는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사회적 존재감에 대한 긍정적 원 체험
그렇다면 왜 진로개발 역량은 ‘배움터’보다 ‘삶터’에서 잘 자라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한국의 배움터는 ‘현재의 과제들을 유예하는 곳’이다. 노동은 학교 이후부터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직업 경로는 ‘삶을 유예하는 준비생 계급’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선발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이돌 연습생, 취업준비생, 고시생, 그리고 학생. ‘생’ 자가 붙은 청소년들은 모두 체계(시스템)로부터 선발되기 위해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생(生)’을 유예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경쟁과 상대평가 속에서 늘 자신의 존재 의미와 다음 단계의 소속감에 대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삶에 기초한 다양한 경험이 만들어내는 자발적 선택의 경험, 자기 효능감 등이 쌓일 리가 없다.
반면 노동을 조금 더 넓게 해석해서 ‘개인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누구나 ‘지금 당장, 여기에서’ 일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다. 사실 대학입시-사교육 시스템이 고도화되기 이전까지는 많은 아동과 청소년들이 공부 이외의 ‘일’들을 무엇이든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지금의 ‘준비생 시스템’ 내에서 일과 삶은 합격 이후에야 시작되고, 천신만고 끝에 합격을 하더라도 내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금세 퇴사해버리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16년에 306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신입사원 100명 중 27명이 1년 이내에 퇴사하고 있으며, 퇴사의 가장 큰 이유는 조직 및 직무적응 실패(49.1%)라고 밝히고 있다(『2016년 신입사원 채용실태 조사』, 한국 경영자 총협회, 2016).
청소년기는 ‘사회적 존재감에 대한 긍정적 원 체험’을 얻어야 하는 시기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상대방을 믿고 같이 일을 도모하며,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을 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말이다. 이러한 긍정적 원 체험이라는 기반이 취약하면 이후의 경험들이 자원으로 쌓이지 못하고 튕겨나가게 된다. 자신도 타인도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회라면, 최소한 진로의 관점에서는 십 대까지의 중등교육이 사회적 자아로서의 긍정적 원 체험을 제공하는 ‘삶터’의 기능에 가까워야 한다. 그 위에 ‘배움터’로서의 고등교육 기관들이 지식을 쌓아주고, ‘일터’에 들어가 그동안 교육받은 사회적 자아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노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청소년기에 도구적 이유 없이 일상적으로 무언가를 도모해보고 인정받아보는 경험을 원천 봉쇄한다. 오직 시스템 속에서 다음 단계로 선발되어 나아가기 위한 소모적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에 대한 원 체험이 아예 없거나 부정적으로 형성되다 보니 그 위에 아무것도 쌓이지 않게 된다. 이는 엄기호 선생이 요즘 청년들이 갖고 있는 어려움을 ‘존중에 대한 원 체험의 부재’로 설명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끔찍할 정도로 존중받아본 적이 없다. 시민으로서 국가로부터 존중받아본 기억도, 학교에서 학생으로서 존중받아본 기억도, 직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존중받아본 기억도 별로 없다. 존중에 대한 ‘원 체험’이 없다 보니 무시를 당했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도 잘 모른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면서 분노할 뿐이다(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창비, 2016, pp.115-116)."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아보지 못한 개인은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청소년이나 청년을 싸잡아 병리화해서는 안되지만, 그들 중 다수가 부모와 사회로부터의 존중과 인정을 받지 못했고 이것이 다양한 어려움을 발생시키는 사실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어쩌면 청소년의 자율성을 해치고 무기력을 양산하는 것은 과잉 시스템, 혹은 ‘과잉교육’ 일지도 모른다. 과잉보호가 자율성을 후퇴시키듯, 교육이 지나치게 체계화되면 그만큼 스스로 배우는 근육은 퇴화된다. 청소년기에 배움의 근육이 줄어들면 이후에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아도 인풋이 되지 않고, 일터에서 어떤 것을 경험해도 내 일머리로 습득되지 않는다.
탈고용사회의 진로역량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나갈 수 있는 역량이 갖춰져 있는지를 시급히 점검해야 한다. 생애주기에 맞춰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구성해나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삶의 기술을 갖춰가는 것이 진로교육의 핵심이라면, 현재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조화된 진로교육은 배움터와 삶터 전체로 탈중심화되어야 한다. 물론 동시에 비구조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져 온 진로활동들을 공유 가능한 형태로 조금 더 맥락화하고 언어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비구조적 프로그램에 집중해 왔던 하자센터 역시 이런 맥락화와 언어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꼭 학교 밖으로 나가야만 탈중심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공교육과 대안교육의 사이 어디엔가 학교를 만든 경우도 있다. 3년 전부터 서울시교육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고교 자유학년제 ‘오디세이학교’는 고교 1학년 학생들이 입시경쟁과 교과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1년 동안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성찰하며 배움과 삶의 주체로 성장하는 교육과정이며, 하자센터도 2016년부터 하나의 캠퍼스로 참여하고 있다. 오디세이 학교는 자기 길이 보이지 않아도 무엇인가를 도모해볼 수 있도록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전환력’을 길러주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청소년의 미래지향적 진로역량을 관찰하고 재정의할 수 있는 훌륭한 테스트베드이기도 하다.
올해 하자센터는 지난 10년간 센터의 대표적인 진로 프로그램이었던 ‘일일 직업체험 프로젝트’의 이름을 ‘비커밍 프로젝트’로 바꾸고 대대적인 개편을 진행하기도 했다. 주된 변화는 직업체험으로부터 진로역량강화로의 방향 전환이었으며, 몸 감각 깨우기, 생활기술, 시민성 등의 세 가지 영역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보았다. 구체적으로는 ‘나를 발견하고 나의 감각을 깨워보기’,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동료가 되어보기’, ‘우리의 움직임이 사회와 어떤 연결을 갖는지 알아보고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기’ 등의 흐름 속에서 수업이 진행된다. 물론 두 시간 반의 일회성 프로그램이라는 한계가 크긴 하지만, 주어진 시간 내에 얕은 삶의 기술들이라도 ‘장착’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버리지 않고 있다.
사회적 신뢰, 가장 중요한 기층 역량
서두에 언급했던 국제교류 행사에서, 갑자기 사회자가 공통질문이라면서 한 가지를 물어왔다. “당신이 일을 하면서 만났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었나?”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없다. 나는 항상 내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지지를 받아왔다.” 역경을 이겨낸 감동 스토리를 원했던 사회자는 조금 실망한 눈빛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주변의 환경이나 지지 없이 내 소질과 노력만으로 이뤄낸 일은 것의 없었다.
자기계발 담론의 신봉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어떤 일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본인의 소질과 노력 외에도 동료와 지원자, 경제·사회적 자본, 그리고 때로는 운이 필요하다. 아래의 수식처럼, 한 사람의 역량은 동원 가능한 자원과 접근 가능한 기회를 더한 후에, 그 일을 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빼야만 제대로 계산할 수 있다.
역량 = 능력(소질 ×노력) + 자본(자원 ×기회) - 장애물
따라서 진로교육과 직업역량을 논할 때에도 사회적 관점이 개입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개인의 ‘능력(소질과 노력)’ 관점에서 삶을 바라봐왔다. 하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한 사람이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증여되는 것들도 많다. 그런 자본을 갖지 못한 청소년들에게는 사회가 무조건적으로 증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본이 바로 ‘신뢰하는 능력’이다. 신뢰가 자본인 이유는, 자신과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타인에게서 신뢰받는 사람일수록 일을 더 잘 하고 자원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사회자본’ 논의와 비슷하게 이 ‘신뢰자본’은 경제적 계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저신뢰 사회라 일컬어지는 한국은 평균값도 매우 낮을 것이다. 사실 탈산업사회적 경제시스템에서는 좋건 싫건 자기신뢰와 상호 신뢰가 필수적이다. 시민사회적 연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이 불안정할수록 신뢰의 연결망 안에 존재하는 사람이 살아남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은 앞서 말한 ‘사회적 존재감에 대한 긍정적 원 체험’을 제공하면서 청소년들이 신뢰를 연습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개인의 진로를 넘어 사회의 진로를 고민할 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청소년 개인의 진로를 넘어 이 사회 자체의 진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다가오는 초연결사회에서 한국과 같은 저신뢰 사회는 마치 포장도로가 없는 저발전국과 비슷한 형국을 맞게 될 것이다. 일터에서 아무리 개인이 창의적이고 느슨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해도, 그 행위를 담는 그릇인 조직문화나 사회적 인식, 법제도 등이 권위주의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면 개인과 사회 모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이것들은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 무형의 사회적 인프라다. 70년대에 고속도로를 짓던 각오로, 일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 고민하고 무형의 인프라에 대해 결의와 투자를 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사회의 진로를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청소년들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쌍안경이 될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진로 모델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는 것이다. 4인 가족이 남성 가장의 고용노동에 모든 삶을 의지하고 여성은 돌봄 영역에 남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급 노동을 감내하던 ‘가장-돌봄 제공자 분리 모델(breadwinner-caregiver model)’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요즘 ‘워라밸’이라 불리며 청년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워크 라이프 밸런스’ 역시 하나의 모델(일-생활 양립 모델, work-life balance model)이 될 수 있다. 하지만 10년 후, 20년 후를 생각한다면, 일과 삶의 분리를 넘어선, 능동적 일-생활 통합 모델(active work-life convergence model)이 필요하지 않을까. 일과 삶이 뒤섞인다는 말이 아니라, 개인의 상황과 선택에 따라 일과 삶, 돌봄과 예술 등의 비율을 조절할 수 있는 모델 말이다.
‘탈고용사회’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고용사회’가 끝나간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뀐 것은 없다. 아마도 많은 청소년들이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이 모두를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기성세대가 과거지향적 진로관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미래는 한발 더 현재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