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의 Youth/News
('아키의 Youth/News'는 하자센터 뉴스레터인 '하자 마을 통신'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3월호 원고 말미에, 4월 주제를 '탈학교 청소년'으로 정했다. 주제를 고민하는 시간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선을 그어 놓으니 그 선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 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예고편을 만난 후, 내 마음은 이미 먼 곳으로 달아나버렸다.
[10대, 그리고 탈출]
"돌이켜 보니, 나의 10대를 지배했던 감정은 '분노'였다. 귀를 닫고 자기들의 의견만을 강요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얼마 전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선거연령하향 촉구 농성장에 지지방문을 한 표창원 의원의 말이다. 이런 분노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10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감정이다. 그 분노가 표출되거나 수용되지 못할 때, 10대들은 자신이 속한 곳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대략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일까, 우리 사회에서 10대들에게 탈출이 '선택이자 가능성'이던 시대가 있었다. 당시 몇몇 어른들은 10대들에게 탈출이 아닌 '탈주'라는 단어를 붙여주었다. 서울시립 진로특화기관인 하자센터는 한 때 탈주하는 10대들이 몰려드는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끊임없는 부대낌 속에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마주하면서, 공공적 자원과 우정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것을 깨우치고, 언제 돌아와도 환대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쌓아가는 시공간이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2000년 전후 하자센터를 거쳐간 많은 10대들이 사회로 나아가 독립적인 (문화) 작업자가 되었다.
반면 지금은 모두에게 탈출이 '생존 전략'이 된 시대다. 마치 자아를 걸어놓고 공매도를 치는 투기꾼처럼, 모든 일에서 단타로 치고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요즘의 삶이다. '이곳'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반드시 '저곳'으로 건너가야만 하는 상황. '저곳'이란 누군가에게는 온라인 게임이고, 누군가에게는 소셜 네트워크이며, 누군가에게는 퇴사 후의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그 길을 쉼 없이 혼자 건너가고 있다는 점이다. 좌절했을 때 돌아와 동료들과 한 숨 돌릴 수 있는 베이스캠프조차 없이.
[1980년대에 대한 애정으로 2040년대를 상상하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탈출이 가능성이던 시대를 추억하는 '옛날 아저씨'들이, 탈출이 생존이 된 '요즘 10대들'에게 건네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배경은 생태적 환경과 경제 시스템이 망가진 2045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상세계인 <오아시스>에 접속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특히 <오아시스>의 창시자가 사망하고 난 뒤, 사람들은 <오아시스>의 통제권과 막대한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그가 남긴 '이스터 에그(게임 개발자가 자신이 개발한 게임에 재미로 숨겨놓은 메시지나 기능)'를 찾기 위해 더욱 가상현실에 집착하게 된다.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 동시대 최고의 기술로 구현해낸 이 <오아시스>라는 가상현실은, 설정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게 없다. 가상과 현실을 오간다는 점에서 <트론(1982)>이나 <매트릭스(1999)>, <아바타(2009)>, <썸머 워즈(2009)>, <후아유(2002)> 등이 떠오르기도 하고, 덕후 감독이 덕후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이 떠오르기도 한다. 굳이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의 레퍼런스를 들먹거리지 않고 우리 식으로 쉽게 얘기하자면 <리니지>와 <싸이월드>를 합친 곳이라 해도 무방하다.
창시자인 '홀리데이'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오아시스>에서도 현질(온라인 게임의 아이템을 현금을 주고 사는 것)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상현실 속에서나마 자기효능감을 얻기 위해 아이템을 구매하느라 현실에서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강제 노역에 끌려가기도 한다. 비인간적인 노동강도 끝에 죽어서야 노동현장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나도 그럴법한 디스토피아적 근미래가 아닌가. 천주희의 <24번 계산대, 그녀를 애도하며>라는 칼럼처럼, 누군가는 그것이 이미 우리 앞의 현실이라 말하겠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영화의 방향이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복고적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80년대의 팝컬처에 대한 헌정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은 명백히 1980년대에 대한 애정으로 2040년대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가상현실은 그 시절의 가상현실과 어떻게 다를까.
['노동 없는 사회'의 가상현실]
지금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현실보다 지배적인 가상현실'이라는 설정이 대단히 독창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상황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현실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건 싫건,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인해 우리는 '노동 없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가디언지에 기고한 「The meaning of life in a world without work」라는 글에서 2050년경 일을 할 수 없는 새로운 '잉여 계급 useless class'이 나타날 것이며, 이들은 하루 종일 3D 가상현실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상현실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 합법적 마약의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고안된 컴퓨터라는 기계가 '철저히 비생산적인 활동'인 게임에 의해 대중화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과거 80년대에 노동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어른들은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아이들'을 지긋지긋해했지만, 앞으로 닥쳐 올 노동 없는 사회는 '하루 종일 게임 속에 머물러 있어주는 사람들'을 고마워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막대한 이윤이 현실 세계의 자원이나 생산력이 아니라 가상의 콘텐츠나 추상적 의미의 돈 자체(금융)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우리는 가상이 현실이고 현실이 가상인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현실-비현실, 노동-비노동 사이의 아이러니는 현재에 이르러 훨씬 더 확장되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기본적인 구도는 팝컬처를 물신적으로 신봉하는 이들(fan boy)과 그 팬덤을 이용해 돈을 벌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혐오하는 세력(hater) 간의 갈등이다. 오히려 기성세대의 원저자(author)에게는 경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세대갈등과는 다른 맥락을 상기시킨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10대들이 비꼬고 있는 상대는 정작 자신이 텅 비어 있음은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팬덤의 비생산성을 깔보는 '꼰대'들이다. 콘텐츠를 창조하거나 재창조하는 힘이 상당 부분 '초연결 상태의 대중'에게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미디어 기업이나 플랫폼 사업자들이 마치 자신들을 대단한 '생산자'로 여기는 것을 보면 그 거부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노동의 끝에서 사회를 만나다]
사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단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마냥 생각 없이 흘러가는 팝콘무비도 아니다. 영화 내내 감독은 많은 10대 청소년들이 갖고 있을 법한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은 욕망'과 '사회와 접속하고 싶은 열망'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 '파시발'이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연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I just came here to escape.
But I found something much bigger than myself.
I found cause, I found my friends, I found love.
"나는 탈출하기 위해 오아시스에 왔지만, 나 자신보다 큰 의미와 관계를 만나게 되었다." 조금은 닭살 돋는 멘트이지만, 이는 사회가 제시한 노동(현실)-비노동(가상)이라는 게임의 축을 송두리째 비트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상현실 게임 속의 주인공은 단순히 '노동을 하지 않는' 비노동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보다 큰 무언가'를 찾게 되었다. 그 무언가(의미, 친구, 사랑)는 다시 말해 곧 '사회'다. 파시발은 비생산적 가상 게임을 수행함으로써, 생산성이라는 미명 하에 현실세계가 파괴해 왔던 '사회'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게임의 목적은 이기는 것(winning)이 아닌 즐기는 것(playing)'이라 역설한다. 확장해보면 '인생의 목표는 일하는 것(working)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living)'이 아닐까. 물론 사람들이 '이기기 위해 일하기보다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해도 현실의 문제들이 마법처럼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도로부터 현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는 있다. 아래에 그중 세 가지를 정리해보았다.
[하나. 탈출은 함께해야 안전하다]
영화 초반, 주인공 파시발은 "나는 클랜 clan을 만들지 않아."라는 말을 반복한다(인터넷에서 클랜은 똑같은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길드보다는 작은 모임을 말한다). 집단을 떠나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얘기다. 반면 거대 기업 IOI를 이끌고 이스터에그 찾기에 뛰어든 악역 '소렌토'는 "우리는 군대급의 인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자랑한다. 그 '군대'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결국 파시발은 친구들과 클랜을 만들게 되고 타인과 연계하는 법을 배운다.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는 청(소)년들이 개인화, 파편화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정도가 심각하다. 이미 3차 산업혁명 때부터 중요했던 '관계, 협력' 등의 역량을 무시하고 예전과 똑같이 경쟁을 통해 개인의 생산성만을 높여온 결과다. 입시와 경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한국의 청(소)년들은 협력이 필수인 노동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지만, 함께 손을 잡고 비노동의 세계로 탈출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사회와 접속하고 싶은 이들의 열망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언젠가 이 같은 서투름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둘. 덕질이 세상을 구한다]
앞에서 말했듯 <레디 플레이어 원>은 1980년대에 대한 애정으로 2040년대를 상상하는 영화다. 이 ' 애정'이 없었다면 영화는 무척이나 공허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덕질에 대한 덕질'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덕질이 세상을 구한다'는 문장이 머릿속에 각인된다. 그런데 여기서 덕질의 본질은 '잉여력으로부터 흘러넘치는 과잉 노력(excessive effort)'이 아니라, 타자를 아끼는 마음이다. 현실세계의 네가 어떤 사람이더라도, 때로는 물건일지라도, 때로는 가상일지라도 너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마음, 그것이 있어야 개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신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조금 실망했다가 두 번째로 보면서 행복감에 사로잡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많은 레퍼런스와 빠른 전개를 머릿속에서 걷어내고 나니 70대 감독과 40대 원작자, 10대 독자 또는 관객들 사이에 형성된 '덕토피아'가 진하게 느껴졌다. 이런 의미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 감독이 40년 영화 인생의 막바지에서 '팬들에게 보내는 팬레터'이기도 하다.
[셋.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스터에그]
그런데 스필버그 감독이 누구던가. 팬레터도 그저 그런 흔해빠진 펜레터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필름에 새겨 넣은 이스터에그들의 천국이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한 두 개를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덕질 커뮤니티의 일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티렉스부터 건담까지 수백 개의 이스터에그를 제공한다(영화 리뷰 유튜브 채널 'New Rockstars'는 영화 속에 담긴 300개의 이스터에그를 설명하는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어쩌면 현재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로부터 조건 없이 이스터에그를 받아보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경쟁 속에서 노력과 실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 먼저 길을 걸어간 선배 세대의 애정이 담긴 표식. 그리고 때로는 다음 단계로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트키 같은 것 말이다. 기성세대는 자꾸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서 청(소)년들을 그 안에 구겨 넣기보다, 자신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이스터에그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인류 문명이 급격한 전환을 해야 할 때 그들과 함께 화면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덧) 수많은 레퍼런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와 가장 가까운 작품은 80년대 신스팝의 지존 격인 '아하(A-ha)'의 <테이크 온 미> 뮤직비디오라고 생각한다. 한 번 보셔도 좋을 듯.
2018년 4월
아키(이충한) akii@haj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