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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kii Choonghan Jan 15. 2024

모든 청소년들이 자신의 자리에 존재할 수 있기를

(2022년 하자센터 애뉴얼 리포트)

(하자센터의 2022년 애뉴얼 리포트 여는글을 옮겨 싣습니다.)


2022년,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였습니다. ‘B급’ 영화의 외양을 하고 있고, ‘모든 것들이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제목도 다소 장난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영화의 내용과 제목이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영화 Everyghing, Everywhere, All at once 웹포스터>

굳이 영화를 언급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수업 기간 동안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자신이 두 개 이상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멀티버스’를 경험했습니다. 화면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나는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Zoom 강의실 안에 있지만, 육체를 지니고 있는 나는 자신만의 공간에 혼자 머물렀던 거죠. 물론 과거에도 ‘공상에 빠진 학생’들은 언제든 유체이탈을 하듯 교실로부터 멀리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기에 다른 나라의 문화콘텐츠에 빠져 국경을 초월한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경우들도 종종 있었지요. 하지만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된 지금과는 달리, 세상 대부분이 물질적 한계로 둘러싸여 있던 시대에는 자기 자리에서 탈피하기 위한 공상이나 ‘덕질’에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졸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눈을 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술을 시전해야 했고, 멍하니 있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의 당혹스러움, 수입된 콘텐츠나 굿즈를 확보하기 위한 비용 등 장애물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동시에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화상카메라를 끄기만 하면 Zoom 교실을 뛰쳐나갈 수 있고, 월 만원 남짓의 OTT 구독료로 나를 공감해 주는 콘텐츠들 속에 파묻혀 살 수 있는 지금의 상황과는 비교가 될 수 없죠.      

물질적 한계와 관계적 맥락이 점점 약해지면서, 우리는 손쉽게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컴퓨터 모니터에 ‘이탈리아 비 내리는 단독주택 창가, 감성 라이브’ 영상을 틀어 놓은 채 평화로운 이국적 일상을 즐길 수도 있고, 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참사를 다각도로 촬영한 숏폼 비디오를 여러 번 자동 반복하며 유사 트라우마와 안도감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대체 현실’들을 적극적으로 검색하지 않아도, 나의 취향과 역사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친절한 알고리즘이 지속적으로 추천해 줍니다. 스마트폰 스크린 위에 떠다니는 1분 남짓한 ‘세상의 모든 대체 현실들’을 손가락 하나로 쓱쓱 넘기다 보면, 정작 나의 시간은 ‘순식간에 삭제’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면 그 삶은 나만의 고유한 삶일까요, 알고리즘으로 공유된 이들과의 집합적인 삶일까요?       


<2020년 하자센터 서울청소년창의서밋의 ZOOM 화면 캡처본>


경험의 영역만 네트워크로 공유된 것이 아니라, 작업과 생산도 ‘나’라는 주체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작년 하반기 테크 업계에 충격을 준 인공지능 챗봇인 ChatGPT를 사용해 보면, 미래세대 청소년들은 앞으로 여러 가지 인공지능과 함께 일을 해나가게 될 것이라는 걸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현재 출시된 기술만으로도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인공지능과 ‘함께’ 해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에게 과제나 논문 작성의 일부를 맡겼을 때, 그것은 ‘표절’일까요 ‘지식노동’일까요? 노동과 노동이 아닌 것(비노동)을 가르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 될까요? 이처럼 앞으로 노동, 작업, 혹은 활동을 늘 인공지능과 함께하게 된다면, ‘자기 선택과 책임’이라는 근대적 행위의 기반 역시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이 경험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기성세대가 ‘삶’이라 생각하는 ‘단독 자아에 기반한 삶’은 이러한 ‘대체 현실, 공유 경험,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활동’들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웠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 전체의 미래 진로를 청소년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하자센터의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큰 도전입니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희망 직업을 물어보면 ‘내가 지속적으로 노동하지 않고도 수익이 발생할 수 있는 직업’을 상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그들에게 물질적인 노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내 몸뚱어리로 일한 시간만큼만 벌어서는 평생 내 한 몸 누울 집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세상에, 콘텐츠 크리에이터, 인플루언서 등 자기 노동의 결과물을 경계와 막힘이 없는 복제와 확장을 통해 수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플랫폼 기반 비물질 노동자들’이 청소년들에게는 훨씬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변화 역시 무엇이 좋다, 나쁘다를 따지고 있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확실한 경향성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관찰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 경험보다 비물질적 경험의 비중이 앞서는 순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존재적 허무감을 느끼기 쉽다는 점입니다. 캄캄한 우주에서 나의 좌표를 잃어버리는 느낌이랄까요. 과거에도 고도의 추상화된 작업을 하는 지식인이나 예술가,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유명인이나 권력자들은 종종 겪었던 어려움이죠. 아직 인류는 물질적인 신체라는 제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이것이 금세 익숙하거나 견디기 쉬운 감각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삶의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제목처럼 ‘모든 것이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내가 여기에서 이 일을 왜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이처럼 중력과 마찰력을 벗어난 세계의 속도와 자유도는 꽤나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영화 '에에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던, 이른바 'Rock Scene'>

지나간 세계와 다가오는 세계 사이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가 아니라 ‘전환 역량과 균형감각’의 유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균형의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지요. 이 감각을 연습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영화 속의 ‘조부 투파키’처럼 슬픈 공허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일단 지금 하자센터는 기다란 장대를 들고 균형 감각을 연습 중인 곡예사와 같은 입장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단단한 설자리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고민들을 공유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시다면, 저희와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깊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일지도 모르니까요.  


하자센터 기획부장 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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