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전직군인 아저씨
북극러시아 (3)
이전 글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3일째, 마지막 날.
잠에서 깨어 창밖을 보니 깨끗하게 구름이 개어있었다!
날씨는 너무나도 청명하고 입김이 나올 정도로 쌀쌀했지만(7월 6일이었음) 얼른 씻고 주섬주섬 트레킹할 준비를 했다. 가지고 온 옷(맨투맨과 후드, 항공잠바)을 전부 껴입어도 안되겠어서 몸에 담요를 두르고 마을 뒷길로 나섰다. 촌스런 파란색 월드컵 담요(러시아 월드컵이라고 마트에서 행사하길래 샀음...)를 두르고 걷는 동양인을 보면서 마을사람들은 전부 부담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추운걸 어떡해.
흙길을 따라 터벅터벅 올라가는데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추워서 그냥 진짜 눈이 시린거였을 수도) 거울같은 호수와 연못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벌판을 지나 쭉 걸었다. 계속 걸어올라가다 보니 저 멀리 북극해가 보였다. 들판은 관목과 이끼밖에 없어서 그늘하나 없었지만 바닥이 푹신푹신해서 걷기 좋았다.
영화 <리바이어던>에서 주인공이 바닷가 절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신께 질문을 하던, 바로 그 절벽이 보였다. 상쾌한 바닷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목표는 폭포기 때문에! 그곳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고 걷다가 어떤 러시아 아저씨 세 명이 모자를 쓰고 나한테 다가왔다. 완전 쫄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좋은 아저씨들이었음)
“젊은이, 지도 있나? 폭포로 가려면 어느쪽으로 가야 해?”
딱봐도 외국인인 내가 그들보다 잘 알 것 같지 않은데...그래도 같이 구글지도를 켜서 찾아봤다. 나도 어차피 폭포가는 길이니까 아저씨들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 그래도 말동무가 생겨서 좋았다. 아저씨들은 각자 고향은 다르지만(페트로자봇스크, 스몰렌스크 등) 시베리아 벌판에서 함께 장교로 복무했던 친구들이었다. 여기에 낚시와 캠핑을 하러 왔다는데 누가 러시아아저씨들 아니랄까봐 심지어 이 날씨에 비치에서 수영까지 했다고 한다...
그 중 한 아저씨 이름이 세르게이였는데, 학교에서 내 러시아 이름도 세르게이였다....ㅎ 러시아에서 제일 흔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그게 또 뭐라고 이상한 동질감이 생겨 우리는 학교생활, 군생활 등 온갖 수다를 떨며 걸었다. 나머지 아저씨 둘은 힘들어서 남아있고 세르게이 아저씨와 단둘이 폭포까지 가기로 했다.
한 가족이 폭포 옆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캠핑 중이었다. 아이는 연을 날리고 있었고, 부부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폭포를 보니까 너무 시원했다. 역시 <리바이어던>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한 시간 반 가량을 산넘고 물건너 도착한 폭포였지만 세르게이 아저씨는 나보고 더 깊이 들어가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아저씨를 따라 호숫가를 따라 쭉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냇물을 건너고 언덕을 오르자 다른 호수가 나왔는데, 알고 보니 길을 잘못 들었다. 다시 나와서 다른 언덕으로 올라가자 허리까지 올라오는 높이의 거대하고 새까만 돌들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나왔고,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게 그 돌을 지나 옆쪽의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심하다. 게다가 이 곳의 산은 나무 한 그루 없고, 푹신푹신한 이끼는 경사로에서 미끌미끌하기까지 했다. 아저씨는 멀찍이 떨어져서 먼저 올라가고 있었다. 아, 아저씨 따라 올라갈까 그냥 여기서 머무를까 하다가 좀 쉬려고 앉았는데, 아저씨가 뒤돌아보더니,
“뭐해, 젊은이! 내가 65살인데 힘들어하지 말고 빨리빨리 따라와!”
막 다그쳐서 허둥지둥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니 아찔했다.
무서워서 허겁지겁 뛰어올라보니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젖은 들판을 지나니 발 아래로 훤히 펼쳐진 바닷가가 보였다. 저 멀리 대포들도 보였다. 아저씨와 나는 신나서 날뛰었고 갑자기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휴대용 폭죽을 꺼내더니 기념으로 피융~하고 쐈다. 내게도 하나 건네줘 쏴봤는데 쾌감이 엄청났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따라오지 않고 남았던 아저씨 둘을 다시 만났고, 아저씨들은 차에 태워줄 테니 마을까지 같이 돌아가자고 권유했다. 고마웠지만 차는 이미 짐으로 꽉 차있었고 나는 짐짝 사이에 끼여 앉은 것도 아니고 얹힌?채로 아저씨들이 주는 보드카를 들이마시며 마을로 되돌아왔다. 술 잘 못마시는 나는 한잔 마시고 또 해롱거리면서 아저씨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왜 하필 떠나려니 날씨가 이렇게 좋은지, 숙소에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고 나서 식당이 있는 남쪽 마을로 되돌아와서 점심을 먹었다. 올 때는 버스로 돌아왔지만, 되돌아갈 때는 맞는 버스가 없어서 호스텔 주인아저씨에게 돈을 주고 무르만스크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버스타고 올 때의 안개끼고 칙칙한 늪지대는 돌아갈 때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들판으로 바뀌어있었다. 기사 아저씨랑 또 수다를 떨며 (하루라도 수다를 안 떨면 입에 거미줄이 생김) 무르만스크로 돌아왔다.
첫 날의 칙칙한 회색빛 무르만스크는 날씨가 맑아지니 산뜻한 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날씨가 이렇게 중요해... 짐을 푼 뒤 저녁식사를 한 후 첫날의 교회에 다시 갔고, 그 길을 쭉 따라 걸으며 2차대전 기념비 '알료샤 동상'으로 갔다.
밤 11시쯤 도착하자 살짝 노을이 지며 무르만스크 항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생수 한 병 들고 알료샤 동상 발 아래에 하염없이 앉아 시원한 바람을 한참 동안 맞았다.
<Защитникам советского заполярья>
(소비에트 북극의 수호자를 위하여)
— 무르만스크 지역은 2차대전의 가장 격렬한 전투지 중 하나였다. 군인의 모습을 한 거대한 알료샤 기념비와 피라미드는 그들을 기리기 위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