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주말여행 1
모스크바에 인턴으로 일하면서 휴가는 사정상 꿈도 못 꾸었다. 단비같던 주말에는 퍼질러 자고, 평일에는 일하고의 반복... 그러다 운이 좋게 노동절 연휴가 끼어 5일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세계지도를 뒤적거리면서 여기 있는 동안에만 갈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우즈베키스탄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사막과 티무르, 옥색 지붕의 환상에 사로잡혀 조금의 고민도 없이 항공권을 예약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배낭 하나 메고 브누코보 공항으로 갔다. 발권을 하려는데, 박스로 칭칭 감아 집채만큼 쌓아올린 짐덩어리들을 옆에 둔 우즈벡인들이 내게 다가왔다. 나보고 짐을 좀 대신 부쳐달라고 했다.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짐을 내 책임으로 옮기는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유떼이르 항공 비행기 안에 들어가니 꾸리꾸리한 냄새가 났고 우즈벡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 옆자리에는 하산이라는 25살 우즈벡인이 앉았다. 나이도 비슷하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러시아 여기저기의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서울은 어떻게 생긴 도시야?”
그가 물었지만 나는 망할 핸드폰 용량 때문에(16기가 실화?ㅠ) 서울에서 찍은 사진을 다 지운 상태였다. 그 이후로 말없이 앉아있다가, 자꾸 힐끔힐끔 창밖을 보길래 자리를 바꿔주었다. 나는 오히려 복도쪽에 앉으니 더 편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누런색의 고향땅을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하산의 눈빛에서 두근거리는게 느껴졌다. 나도 덩달아 두근거렸다.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뜨겁고 건조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이곳은 봄이 30도고 여름이 50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스크바에서 오들오들 떨던 나는 우즈베키스탄에 온 것을 실감하며 탑승계단을 내려왔다.
입국심사로 갔더니 이보다 더 카오스일 수가 없었다. 무질서 그 자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내 앞으로 새치기 하는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속에서 나는 하산 뒤만 졸졸 따라 입국 심사를 받았다. 무서울 것 같았던 심사관은 내 여권을 보더니, 또박또박하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앗살라무알라이쿰’ 하고 인사를 했다. 입국심사가 그렇게 깐깐하다더니 오히려 모스크바보다 착했다. 그렇지만 하산은 여권사진과 얼굴이 다르다며 어딘가로 검사관과 함께 사라졌다. 그의 여권은 닳고 달아 "Ozbekiston"이라는 글씨가 지워져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는 내게 기다리라고 당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결국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공항을 나왔다.
원래 우즈벡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바보같은 짓 중의 하나는 은행에서 환전하는 것이었다. 암시장의 환율에 비해 은행 환율은 거의 날강도 수준이었기 때문인데, 올해들어 환율개혁(?)같은게 있었는지 모든 곳에서의 환율이 통일되었다(심지어 공항 환전소에서도!).
그래서 내리자마자 환전소에 가서 200불을 환전하니 평소에 보기도 어려운 두께의 돈뭉치가 주어졌다. 총 160만 숨을 환전했는데, 여기서 가장 많이 쓰이는게 5천 숨인 것을 생각하면 가지고 돌아다니기 부담스러운 양의 지폐였다. 왠지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아무튼 가방 속에 우겨넣고 버스를 타러 갔다.
남부 기차역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현지인에게 물어봤는데, 어떤 꼬마가 나보고 따라오라고 하면서 한참을 걸어갔다. 18살짜리 딜샤드는 한국어학당에서 4개월째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나한테 자랑스럽게 한국어학당 학생증을 내밀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밖에 모르는 (심지어 안녕하세요도 모름...) 그 친구는 아무래도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나보다.
여튼 그 아이 덕분에 공항 멀찍이 떨어져 숨어있던 버스정류장을 수월하게 찾았고, 정류장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들이랑 함께 버스를 탔다. 1200숨을 내야 하는데 표를 나눠주던 할아버지가 나는 외국에서 온 손님이라며 1000숨만 받았다.(200숨의 행복! 한국돈 27원.) 곧 사람들로 가득찬 버스에선 30도 봄 날씨의 후텁지근함과 함께 아기들은 울고 사람들은 낑낑대며 서 있었다.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기차역을 찾았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주변의 널찍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말로만 듣던 라그만과 치킨 요리를 시켰는데, 라그만은 짭조름하게 맛있었고 치킨은 좀 퍽퍽했다. 꽤나 괜찮은 식당이었는데 다 먹고 나니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4천원 정도가 나왔다.
다시 나와서 기차역으로 갔는데 해질녘이 되었고 역시 선선했다. 기차에 들어가서 바라본 내부는 오래되었지만 깔끔했다. 인터넷으로 듣던 더럽고 지저분한 기차가 아니었다. 화장실도 너무 깨끗해서 긴장했던 스스로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요란하게 금실무늬를 수놓은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이고 누웠다.
침대칸 안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적적하긴 했지만 오히려 엄청 편했다. 곧 해가 지고 기차는 깜깜한 사막 한 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밖은 어두웠지만 새까맣고 반듯한 지평선은 선명하게 보였다.
밝게 빛나는 보름달 아래 창문 틈으로 시원하게 부는 바람, 그리고 200원짜리 향긋한 홍차를 마시면서 침대에 누워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할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기차는 밤늦게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역시나 나오자마자 택시를 외치는 드라이버들을 뿌리치고 멀찍이 떨어진 택시 하나를 향해 갔다. 도시까지 얼마냐니까 만 오천 숨을 불렀다. 그래봐야 2천원이니까 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택시값이 만 숨을 넘을 일은 절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차라리 모를 걸. 그래도 고작 500원 바가지 쓴거라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호스텔에 밤늦게 도착해 보니 모두 자고 있었고, 그 사이의 침대에 몰래 기어들어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