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거나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여 오히려 불편을 가중시키는 행정처리를 흔히 “탁상행정”이라고 부른다. 실 이용자에 대한 공감 없이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행정 처사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거나 오히려 더 큰 불편을 야기하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그런데 최근,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고 있는 “이 제도”가 탁상행정으로 불리며 운전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교통사고 발생률과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개정된 제한 속도 규정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운전자들이 변경된 제도에 대해 입을 모아 탁상행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시행되는 제도에 대해 살펴보자.
지난 2019년 3월,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제19조 제1항에 “’도시지역 중 주거, 상업, 공업지역(녹지지역 제외)’ 내 모든 일반 도로의 최고 속도를 매시 50km/h로 제한한다. 다만, 지방경찰청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매시 60km/h 이내로 제한할 수 있다.”라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이후 2019년 4월, 도로교통법 시행 규칙이 개정되면서 전국 곳곳에선 일반 도로의 제한 속도를 50km/h로 낮추는 등 변화된 제한 속도 규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2년의 유예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확대될 예정이며, 2021년 4월 17일엔 전국 도시지역 일반 도로 최대 속도가 50km/h로 낮아지게 된다.
이미 부산광역시는 약 20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도심 내 변화된 제한 속도 규정을 적용한 상태이며, 광주, 대전 등의 주요 지자체에서도 관련 제도를 하나씩 적용하고 있다. 정부는 제도를 도입하는 46개의 지자체에 대해 제한 속도 표지, 노면 표지 등 관련 시설 개선을 위한 예산으로 86억 원을 지원하였으며, 추후 추가적인 예산을 지원할 계획을 밝혔다.
한편, 변화된 제한 속도 규정에 대한 운전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거액의 세금을 들여 개정하는 제도가 오히려 도로 위의 불편을 만들어 낸다는 이유 때문이다. 과연 운전자들이 지적하는 제도의 허점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를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안전속도 5030 제도”의 장단점을 알아보자.
교통사고 사망자는 주로
도시 내 도로에서 발생한다
통계청의 통계에 따르면,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 중 70%는 도시 내에서 발생한다. 도심 속 도로엔 교통사고에 취약한 이륜차나 자전거의 비율이 타 도로에 비해 높기 때문이다. 또한 도로변을 걷던 보행자가 교통사고에 휘말리거나, 도로 횡단 중에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아 도시 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의 사망률은 타 도로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때, 교통사고를 당한 보행자의 사망률은 차량의 주행 속도 별로 판이한 형상을 보인다. 현재 제한 속도인 60km/h로 달리는 자동차에 치였을 때의 사망률이 90%인 반면, 속도를 10km/h 낮춘 50km/h의 차량과 부딪혔을 때의 사망률은 50%로 낮아진다. 속도를 30km/h까지 낮추면, 교통사고 사망자가 10명 중 1명에 불과할 정도로 사망률이 낮아진다.
통행 시간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교통사고 사망률이 높은 도시 내 도로에서의 주행 속도를 낮추면 뛰어난 사망률 감소 효과를 볼 수 있다. 관련 제도 시행에 따른 경찰청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제한 속도를 10km/h 낮췄을 때 사고율은 13.3%, 교통사고 사망률은 63.6%가 감소했다고 한다.
게다가 제한 속도를 낮춤으로 인한 통행 불편도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시 내 도로에서 제한 속도를 10km/h 낮춤으로써 늘어나는 통행 시간은 2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제한 속도를 낮춤으로써 발생하는 교통 정체 현상은 미비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도로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경찰청과 한국교통안전공단의 발표에 따르면 제한 속도 변경에 대한 실(失)보다는 득(得)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관련 부처의 발표 자료에 대해 “실제 도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통계”라는 비판을 보내고 있다.
도심 내 도로 상황은 수시로 변하며, 특히 차량의 통행량이 증가하는 출퇴근 시간엔 사소한 원인 하나로도 극심한 정체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진행한 통행 시간 측정은 교통 체증이 없는 단순 주행 상황에서 이뤄진 실험일 뿐, 실제 주행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통계적 수치라는 것이다.
게다가 강원도 원주에선, 왕복 6차선 도로의 제한속도를 30km/h로 규제하는 등 실제 교통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행정 처사로 운전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60km/h 도로에서 30km/h 도로로의 전환이 급격히 이뤄지므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운전자들의 사고 발생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지역 경찰청장의 재량에 따라 일부 도로의 경우 제한 속도를 60km/h로 둘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원주의 사례처럼 정확한 도로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변화된 제한 속도 규정을 적용하여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가 한동안은 지속적으로 발생할 전망이다.
규정 변화에 대한
충분한 안내도
이뤄지지 않았다
변화된 제도에 대한 홍보가 미비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경찰청에서 운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안전속도 5030제도 인지 조사에 따르면 변화된 제도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운전자의 비율은 전 연령 평균 68.1% 정도이다.
또한 수동 업데이트를 사용하거나 업데이트 속도가 느린 몇몇 내비게이션의 경우, 변화된 제한속도 규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책을 인지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주행하다 과속에 적발되거나 급정거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는 일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제한 속도를 낮추면
연비 효율도 낮아진다
차량의 경제 속도란, 연료를 가장 적게 사용하면서 가장 많은 거리를 갈 수 있는 속도, 다시 말해 연비 효율이 가장 좋은 속도를 말한다. 경제 속도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주행하면 연료의 소모량이 커지므로 연비 효율은 감소하게 된다.
일반적인 승용차의 경제 속도는 60km/h에서 80km/h 사이이다. 때문에 제한 속도가 낮아지게 되면 당연히 차량의 연비는 상승하게 된다. 특히 일상적인 통행이 잦은 도심 속 도로에선 특히 연비 효율을 중시하는 운전자들이 많기 때문에, 제한 속도 규정으로 인한 연비 효율 저하도 변화된 규정이 환영받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관련 제도에 따른 네티즌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전형적인 탁상행정”, “이런 식으로 교통사고 사망률을 줄이려면 차라리 차량 운행을 전면 금지해라”, “차라리 교통비를 지원하고 차량을 반납시키지 그러냐”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주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제도의 허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도심 속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은 신호 위반이나 불법 차선 변경 때문인데, 이를 근절시키기 위한 대책 마련 없이 단순히 속도만 제한하는 것은 탁상행정에 불과한 잘못된 대처라는 것이다.
국내 교통 상황에 따른
제도 정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은 OECD 선진국 중 제한속도가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며, 이미 교통사고 발생률이 낮은 선진국들은 오래전부터 안전속도 5030 제도를 도입해왔다. 하지만 제도를 시행 중인 핀란드, 노르웨이 등의 국가와 우리나라의 교통 상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국내 도로에서의 사고 원인과 도로 교통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 관련 제도를 보완하여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일이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변경된 제한 속도가 적용된 도로는 3개월간의 계도 기간을 거친 후 과속 단속이 실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