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새벽, 날은 아직 새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주무시는지 혹은 깨셨는데도 내가 나가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계시는지 몰랐다. 어머니 방문을 향해서 내 눈길이 한참을 머물렀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온 집안이 고요에 쌓여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타지에 나가 있었고 오직 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나밖에 없는 집이었다. 어머니의 속상하신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결국 인사를 못 하고,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동안 시어머니 모시느라 고생했으니 2년 동안 휴가(?)를 준다고 하며 흔쾌히 나의 베트남행을 허락(?)하고, 시어머니의 반대로부터 방패 역할을 해준 남편은 어떤 마음에 동요도 없이 공항까지 태워주고, 이민 가방 부치고, 기내 수하물 무게 체크까지 모든 과정을 꼼꼼히 도와주었다. 출발 직전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편은 내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환하게 웃었다. 한 손에 캐리어를 쥐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는 어느새 새로운 삶을 향한 출발에 들뜬 마음이 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입국장에 들어가기 직전 입고 있던 코트를 휙 벗어서 남편에게로 보냈다. 나는 이제 코트가 필요 없는 나라로 떠나고 있으므로. 그 찰나의 순간 짜릿한 자유가 스쳐 지나갔다.
50대 중반에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 가보는 나라이고, 처음 혼자 타는 비행기였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나를 마중 나올 사람은 없었다. 혼자 택시를 타고 호텔까지 가야 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호기롭게 비행기를 탔으나 제일 먼저 엄습해 오는 감정은 불안이었다. 호찌민에서 국내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데 국제선 비행장에서 국내선 비행장으로 이동하는 거리가 얼마나 멀었던지. 그러나 나는 더운 줄도 모르고 헐레벌떡 카트를 밀고 달려야 했다. 다음 비행기까지 시간이 두 시간밖에 없었고, 나는 모든 짐을 다시 내리고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 다급한 순간에 비행기에서 선반에 짐 올리고 내리는 것을 도와준 손길, 공항에서 컨베이어 벨트에서 무거운 이민 가방을 함께 내려주던 손길들이 있었다. 감사를 넘어서 감동이 되었다. 내 마음은 아주 많이 낮아져 있었다.
공항에는 아무도 안 나온다고 했고 대신에 사무실에서 택시를 예약해 준다고 했다. 내 이름이 쓰인 플랭 카드를 찾아서 그 택시기사의 차를 타야 한다. 처음 가는 외국에서 비행장에 아무도 마중 안 나온다는 사실이 사람을 얼마나 불안하게 하는 것인지 그때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쉽게 플랭 카드를 찾아서 택시를 탈 수 있었고 택시 기사는 이미 내 목적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베트남에 대한 첫인상은 수많은 오토바이의 물결과 경적소리였다. 단지 시끄럽다는 말로는 충분히 표현이 안 된다. 수십수백만 마리의 개구리들이 나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 들어온다고 할까.
집을 구하기 전 첫 한 달은 호텔에서 보내야 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혼자 호텔에서 지내보기도 또한 처음이었다. 차 한 대도 들어올 수 없는 70년대의 한국의 좁은 골목길이 연상되는 곳에 호텔이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고향 생각이 났다고나 할까. 개들이 어슬렁어슬렁 다니며 골목 어귀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면 골목길은 물로 깨끗이 청소된 흔적이 보였다.
호텔에서의 첫날밤은 너무 힘들었다. 좁을 뿐 아니라 덥고 답답했다. 뜬눈으로 보낸 밤이었다. 돈이 얼마나 더 들어가는 것과 상관없이 날이 새면 바로 방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잔뜩 전투 의욕을 장전하고 호텔 카운터 직원을 만났다. 그런데 내가 장기투숙객이어서 그런지 너무나 선선한 태도로 같은 가격에 꼭대기 층의 넓고 좋은 패밀리룸으로 바꾸어 주었다. 하루에 만 원, 한 달에 30만 원으로, 집을 구하기 전에 그곳에 머물렀다.
창문이 3면에 있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그러나 퇴근하고 오면 외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에어컨을 켜두고 뒤척여야 했다. 그 불면의 밤에 침대 옆 스탠드의 따뜻한 불빛이 나의 마음을 위로했다. 어떤 날 밤에는 한국에서는 전혀 들어볼 수 없었던 따발총 쏘는 듯한 요란한 빗소리에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함 창문만 쳐다보기도 했다.
그곳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서 생애 마지막 생리가 있었다. 나는 가정에서 독립했을 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한 시대를 마감했다는 마감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엄마로서는 그곳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졸업반이었던 큰아들이 졸업 시험을 앞두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면서 전화로 나에게 힘겨움을 토로했다. 연락을 받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간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이 이런 것이었을까. 유급을 한 경험이 있고 또 주변에 몇 년째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동료도 있어서 큰아들은 더욱더 스트레스였던 것 같았다. 베트남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되어서 그 전화를 받고 나는 너무 답답하여 기댈 곳은 오직 신의 존재밖에 없었다. 심지어 만난 지 얼마 안 된 베트남인에게조차 간절히 기도를 부탁했다.
잠 못 자는 밤을 보내고 나면 커다란 창으로 둘러 싸여있던 그 호텔방에 아침 햇살이 가득히 들어왔고 또 그 빛을 받아서 마음은 다시 생기에 찼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시끄럽게 울어 재끼는 닭소리가 한국 시골을 연상시켜 오히려 정겹게 들렸다. 아침부터 내려 쬐는 환한 해 때문에 방에 늘어놓은 빨래들이 금세 말랐다. 창문 너머 보이는 이웃집 마당을 내려다보며 ‘그들의 삶은 어떤가’ 몹시 궁금해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과일 천지였다. 먹을 것만 두고 보면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싸고도 맛있는 과일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단백질이 부족하다 싶을 때는 정확하게 직장 선배 동료가 삶은 계란 등을 보내왔다. 주말이면 선배 동료들이 나에게 마트나 관광지, 그리고 맛집 안내를 해주었다. 먼저 경험해 보았기에 내가 가려운 곳이 무엇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낯선 곳에서 경험하는 뜻밖의 친절은 평소보다 두 배 세배 크게 감사하게 느껴졌고 나에게 힘을 주었다. 그 친절 덕분에 낯설고 외로운 생활에서 쌉쌀한 다크 초콜릿 같은 자유, 낯선 곳을 모험해 볼만한 곳으로 느끼게 하는 용기가 생겼다.
호텔 생활이 나쁘지는 않았다. 또한 아파트를 구한다고해서 혼자 사는 내가 특별히 더 좋을 일도 없건만 호텔에 머무는 한 달 내내 공공의 건물이 아닌 나만의 집, HOME에 들어가만을 간절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