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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혼자 살기의 비결

by 은연중애

드디어 한 달 만에 호텔을 벗어나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것이다. 월 40만원에 방 2개, 거실, 그리고 주방으로 되어 있는 한국에서도 익숙한 형태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25평쯤 될 것이다. 베트남 학교 교사 급여가 월 30만원 정도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아파트 월세는 상당히 비싸다고 하겠다. 외국인일 경우에는 집주인이 외국인 등록도 해줘야 해서 현지인보다 비싸게 받는 것 같았다. 더구나 인맥이 없는 나로서는 집을 선택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토록 혼자 살아보기를 갈망했으나 막상 혼자 살기를 시작하자 제일 먼저 깨닫게 된 것은 나는 이미 사람에게 기대며 사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어린 아기를 안아줄 버릇하면 혼자 있으려 하지 않고 계속 사람에게 살을 붙이고 있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식구들 밥을 다 챙긴 다음에 늘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편했기에 나는 혼자 밥 먹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온전히 혼자있게 되자 혼자 밥 먹는 것이 싫었다. 먹는 것뿐 아니라 자는 것도 그랬다. 자다가 무심코 잠을 깨었을 때 ‘내가 아프면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서늘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혼자이고, 문밖을 나가면 모두 베트남 사람이었다.


한번은 아파트 안에서 문 잠그는 고리가 고장이 났다. 베트남에서는 우리처럼 번호키가 아니라 어디든지 열쇠로 문을 열고 잠근다. 어쩔 수 없이 밤에는 테이블, 의자 등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다 가져와서 문을 막아놓고 자야 했다. 쓰레기를 버리려면 밖으로 나가 길을 건너야 하는데 횡단보도, 신호등이 없었다. 차들 사이로 이리저리 보며 잽싸게 길을 건너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데 비장한 마음으로 가야 했다. 아파트 열쇠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면서. 자칫하면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 할 수도 있으므로.

혼자 살던 집 거실

베트남 도마뱀, ‘게코’를 비롯하여 온갖 벌레들의 출몰은 나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더운 나라여서 그런지 벌레도 많고 크기가 우리 나라에 비해 훨씬 컸다. 벌레들이 어느 구석에서 떨어질지 몰라서 거실에 소파가 있었지만 결코 눕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다. 침대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텐트 모기장을 치고 모기장 바닥 주변 틈으로 벌레가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수건으로 빙 둘러막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벌레 퇴치제들을 두고도 모자라서 한약방에서 계피 나무를 사와서 바닥 여기저기에 놓아두었다.


그 고독의 시간을 버티게 한 것은 ‘사람’과 ‘음식’이었다. 집에서는 날마다 요리하는 것이 너무 귀찮았는데 막상 요리해 줄 사람이 없어지자 뭔가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무의식 중에 요리를 해서 사람들을 자꾸 초대했다.


베트남에서의 첫 크리스마스는 햇빛이 눈부시고, 날이 더운 희한한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초대하여 김밥과 떡볶이를 대접했다. 김밥은 큰아들이 재수할 때 1년 내내 아침마다 말던 것이어서 능숙하게 말 수 있었다. 학생들은 외국인 선생님 집을 방문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기쁨을 온몸으로 뿜어내었다. 집에서 김밥 말던 경험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아들 재수할 때는 꿈에도 몰랐다.


베트남 생활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그리운 사람은 베트남 친구 ‘빈’이다. 그녀는 한 주에 한 번 집에 와서 나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지극정성으로 끊임없이 나의 먹거리를 챙겨주었다. 허기에 지쳐서 퇴근하는 나를 위해 그녀가 아파트 문고리에 종종 걸어 넣고 가곤 했던 ‘분보훼’ 국수를 발견할 때는 너무나 가슴이 따뜻해졌다. 베트남은 설 명절 “뗏” 기간에는 모든 가게가 며칠씩 문을 닫는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인 내가 굶는 것도 아닌데 내 걱정을 하여 그 기간 동안에 설음식을 싸들고 몇 번씩이나 우리집을 방문했던 그녀다.

베트남 설 음식

베트남은 더워서 낮에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휴일 해질녘에 만났다. 그녀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동네 주변을 샅샅이 다녔다: 떨어지는 해를 향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할 때 스쳐가던 시원한 바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오래된 다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강을 건널 때 온 하늘을 물들이던 석양, 울창한 열대 숲속을 헤치고 들어가서 마주한 알 수 없는 갖가지 종교 사원들, 바닷가 양식장 바로 옆에서 먹었던 다양한 해산물들, 밤마다 함께 거닐었던 강가...... 공포의 그 코로나 시기에도 마스크를 하고 나를 찾아왔다. 어디에서 찾았는지 한국 김치까지 챙겨서. 베트남을 떠나기 전날 밤, 그녀는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동네를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른다. 그녀는 헤어지기 싫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덕분에 외국 혼자살이는 회색빛이 아니라 석양의 화려한 빛깔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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