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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낮과 고독한 밤 그 사이에

by 은연중애

TV에서 싱글 여성 연예인들의 화려한 일상을 보면서 감탄할 때가 있다. 자식 키우는 고단함, 살림, 남편, 시집에 얽매여 사는 보통 여성들의 삶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그들. 그들은 우리와는 종이 다른 신인류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문득 들어오는 생각 하나. ‘이 멋진 신인류가 불 꺼진 집에 돌아가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혼자 잠자리에 들 때는 무슨 생각을 할까’


사람에게는 낮도 중요하지만 밤도 중요하다. 낮에는 멋진 옷, 화려한 메이크업, 친구들과의 만남, 직장 생활, 취미 생활, 운동, 여행, 그리고 이 사회에서 나에게 맡겨진 책임까지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낮에 이루어지는 활동들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서 이를 위해 돈 벌고,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집착한다.


감히 연예인들과 나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 또한 베트남에서 나름 화려한 싱글의 낮 생활을 즐긴 것 같다. 직장에 출근하여 한국어를 열심히 즐겁게 가르쳤다. 사명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주말에는 또 살림하고 밥 하는 것에서 자유한 여인(?)이 되어 마치 싱글 여성인 것처럼 열대 이국에서의 삶을 즐기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감히 가보지 못한 고급 호텔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고급 음식을 즐기기도 하고, 해 질 녘이면 베트남 친구들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석양을 향하여 질주하기도 했다. 궁핍하지 않았고, 직장에서 상사에게 쫄 일도 없었고, 가족이 없으니 또한 자유로웠다. “돈”과 “집안 일”과 그리고 “고용 불안”에서 자유했다.


화려한 베트남의 낮: 숲속에서의 식사
베트남 화려한 낮: 호텔 야외 수영장

그러나 밤이 문제였다. 평생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너무 낯설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너무나 사람들 가운데 사는 삶에 익숙해서 사람 귀한 줄을 몰랐다는 것을. 병뚜껑이 안 열릴 때 열어달라고 부탁할 사람, 자다가 목마를 때 물 좀 대신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 벌레가 나타났을 때 내 비명소리에 응답하여 바로 나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결코 시시한 행복이 아니었다는 것을.


직장 생활할 때 입는 옷이 아닌 소박한 잠옷을 입었을 때, 사회생활에서 불려지는 호칭을 다 떼고,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몸과 마음이 평안히 안식할 수 있는 밤이 있어야 화려한 낮 생활이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제야 실감했다. “아무것도 아닌” 밤, “아무것도 안 하는” 밤 혹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밤에 기반하여 낮 생활의 온갖 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베트남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낮 생활이 있었지만 동시에 고독한 밤이 있었다. 잠 못 이루던 그 밤에 연심차를 마시며 잠을 청해야 했고, 겨우 잠든 후에도 자주 잠을 깨어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자다가 불을 켰을 때 냄비 뚜껑이나, 컴퓨터 테이블에서 게코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깜깜하고 고요한 그 밤에 집안 여기저기를 활보하던 “게코”는 내가 불을 켬과 동시에 놀라서 화들짝 도망을 갔다. 그 녀석보다 내가 더 놀랐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한밤의 게코 (베트남 도마뱀)
연심차: 연꽃의 열매차 (불면제로 많이 사용된다)


이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지낸다. 여전히 남편과 시어머니와 함께. 떠나기 전과 지금 나는 무엇이 바뀌었는가? 떠나기 전과 비교해서 바뀐 것이 별로 없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바뀐 것이 있다. 나이 쉰 중 반에 혼자 게코와 씨름을 한 그 밤들이 있었기에 나는 불만이 많이 줄었다. 밤에 거실에서 TV 소리만 들리는 이 일상이라도 하더라도 안심이 되고, 평안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나 말고 다른 사람 ‘존재’가 있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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