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리고 친척 포함 12명(!)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했다. 물론 단지 나만 보러 오신 것은 아니고 베트남 관광여행을 겸해서 방문하신 것이다. 시어머니, 남편, 둘째 아들, 큰 아주버님 내외, 시동생 가족, 시누이 가족.
한국에 있을 때는 그저 그런 친척 사이였는데 이국땅에서 다 같이 만나니 남북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흥분해서 길거리에서 이름을 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마음 저 깊이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확실히 있었다.
우리 시댁은 형제들이 매달 일정한 돈을 내어 자금을 마련하여 둔다. 일종의 형제 곗돈인 셈이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하시지만 병원비는 그 곗돈에서 나가고, 또 매년 한 번 정도 여행도 한다. 내가 해외에 있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번에는 온 친척들이 함께 해외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12명이 모두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했다. 앉을자리도 부족하고 밥그릇 수도 부족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있는 그릇, 없는 그릇 모두 동원해서 국수를 조금씩 나눠 먹었다. 물론 나가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집에서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기분이 좋으니 국수 한 젓가락도 너무 맛있다고 좋아하셨다. 큰 잔치같이 떠들썩한 모임이 끝난 후 친척들은 호텔로 가서 쉬고, 우리 가족만 아파트에 남았다.
가족과 함께 있으니 오랜만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내가 외국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곳이 한국이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가족이 함께 있으니 늘 꽁꽁 닫아놓았던 베란다 문도 밤새 활짝 열어놓고 잤다. 마치 한국의 더운 여름날처럼.
그런데 다음 날이 되니 왠지 모르게 답답했다.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어머니는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누워서 얼굴에 팩을 하시고 남편과 아들은 각각 침대에서, 그리고 거실에서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드러누워 있었다. 사무실에 연차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던 나는 아침 차리고 돌아서니 또 금방 점심을 차려내어야 했다. 차라리 사무실에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러고 나니 저녁은 밖에 나가서 먹자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저녁을 먹으러 로컬 식당으로 출발했다. 하루 종일 집에만 계셔서 산책을 하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해서 구글 지도를 보며 걸어가기로 했다. 지름길로 가기로 했다. 걸어서 20분이라고 나왔다.
그런데 지도와는 다르게 상당히 먼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베트남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길거리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상점들이 많고, 차도, 오토바이도 많아서 마치 우리나라 중소 도시에 온 것 같지만 막상 골목길로 들어서니 오토바이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었다. 흡사 우리나라 옛날 시골길 같았다. 그리고 목줄도 없이 여기저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큰 개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 골목길을 지나자 갑자기 황량한 풀숲이 펼쳐지며 여기저기 묘지들이 보였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 어머니는 자꾸 다리가 아프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도를 믿고 계속 걷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시어머니, 남편 그리고 아들, 나, 네 명이 나란히 한 줄로 서서 무덤 사이 틈을 헤치며 걸었다. 외국에서, 그것도 무덤 사이를 한 줄로 서서 가족이 걷는 모습이 참으로 낯설게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는 함께 있다’라는 알 수 없는 유대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묘지들을 벗어나니 다시 좁은 골목길과 집들, 그리고 그다음에는 다행히 평범한 차도가 나왔다.
마침내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꽤 근사한 식당이었다. 그러나 닭요리를 시켰을 때 치킨 좋아하시는 시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게 닭에 살이 없이 뼈만 앙상했다 더구나 매워서 드시지를 못했다. 가끔 본 빼빼 마른 그 베트남 닭이었다. 어머니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도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다시 버섯 닭고기 수프를 시켰다. 그건 맵지 않았다. 그렇다. 비로소 시어머니 얼굴이 펴지셨다.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아마 남편도 그러했을 것이다. 평안한 가족식사가 되었다.
비록 사랑하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은 참 달콤 살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우리가 함께였기에 그 무덤들 사이를 크게 마음의 동요 없이 걸어 나올 수 있었다는 마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