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고요함 속에 어머니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 화장실 가시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방에서 화장실까지는 몇 걸음이 안 되는데도 으으음.. 음음음.. 신음 소리가 묵직한 발소리와 섞여서 들린다. 듣는 사람의 몸에도 그 힘든 소리가 배여 드는 듯하다.
전날에는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둘째 손자(나의 아들)가 방문했는데도 인사를 안 했다고 울분을 토하셨다. 인사를 안 했을 리가 있겠나? 손자는 할머니에게 인사했으나 귀가 어두우신 당신이 TV 보시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사정을 설명해도 ‘당신이 알아차리도록 끝까지 인사하는 것이 도리’라고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 그 음성에 슬픔과 분노가 차 있었다. 온 가족의 마음에 돌이 하나씩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 저녁 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놓는 일이 있었다. 저녁에 큰아들이 이제 34개월 차 되는 손녀(시어머니에게는 증손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90넘은 나이 드신 노인, 60 넘은 젊은 노인, 노인들만 있는 조용한 집안에 갑자기 생기가 솟아났다. 아기가 있으니 분홍색 영롱한 하트 방울이 방울방울 온 집안을 떠다니는 듯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되었다.
아기의 부드러운 살결, 예상치도 못한 재미있는 말들을 뱉는 갸느린 음성. 모든 것이 신기하고 사랑스럽다. 아기를 보는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고, 노인들이 아기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온갖 애를 쓴다. 안 추던 춤까지 아기 앞에서 추게 된다. 심지어 아기가 할아버지 즉 나의 남편에게만 과자를 자꾸 갖다 주어서 내가 남편에게 질투까지 났다면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34개월 차 손녀와 나의 시어머니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음식을 씹기 좋게 준비해줘야 한다. 외출할 때는 지팡이가 되었든, 손이 되었든 잡을 것이 필요하다. 천천히 여러 번 말해야 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귀기울여 들어야한다. 잘 노는 것이 주요 업무다.
손녀와 시어머니 사이에 공통점은 그 외에도 많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매우 다르다. 손녀가 잘 먹으면 온 가족이 너무나 기뻐한다. 시어머니가 잘 드시면 살짝 불길한 걱정이 든다. 손녀가 잘 못 알아들으면 몇 번이고 다시 친절하게 얘기해 주지만, 시어머니가 잘 못 알아들으면 짜증부터 난다. 손녀가 기분이 안 좋으면 어떻게든 달래주려고 애쓰지만, 시어머니가 기분이 안 좋으면 침묵하며 눈치 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녀와 시어머니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 손녀는 존재 자체로 기쁘고 사랑스럽다. 한편 시어머니는 모두에게서 겉으로 보기에 잘 갖추어진 예의를 받는다. 그러나 진심 어린 사랑을 받는지는 의문이다.
손녀는 피어나는 생명인 반면, 시어머니는 스러져가는 생명이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나이 든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피한다고 한다. 죽음이 연상되기 때문이겠지.
그러면 본능을 거슬러 어떻게 하면 스러져가는 생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 보자.
피어나는 어린 생명은 나의 과거이고, 스러져가는 생명은 나의 미래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귀가 안 들려서 몇 번을 되물어보실 때, 이것이 나에게도 곧 벌어질 일인 것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짜증을 낸다는 것은, 나의 자식도 나에게 짜증을 낼 날이 곧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할 진실이다.
매직 안경이 있으면 좋겠다. 이 안경은 현재의 그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그분을 보여주는 안경이다. 지금의 처지고 주름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창창하던 젊은 날, 위풍당당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안경이다. 내가 맞벌이한 까닭에 어머니가 아이들을 정성으로, 그러나 카리스마를 가지고 힘있게 돌봐주셨던 그날들을 보여주는 안경이다.
추운 겨울 아침 일찍 출근하는 며느리를 위해 밥을 차리셨던 그분을 보여주는 안경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분과 함께했던 추억을 보여주는 안경이다. 그 안경이 있으면, 그 젊은 날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감사한다면,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오늘의 일상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과거를 너무 빨리 잊었다.
나는 소망한다.
나도 힘이 없어지고, 어린아이 같아지고, 기억이 사라지는 날이 왔을 때 신께서는 오늘 내가 힘없는 자를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하고, 도우려고 애썼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