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탤런트 김영옥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말실수한 것을 사과하는 영상을 봤다. 손자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난 것을 보고 무심코 “우리 집안에 여드름 난 사람이 없는데 너는 왜 여드름이 많이 났냐?” 하고 말한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들더란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 마음이 많이 상했겠다고 하면서 사과하는 영상을 보고 시대가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방송에서 주로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의 횡포에 대해서 털어놓았는데 이제는 반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사과하는 영상이 나오니 말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참 어려운 관계다. 가족인데도 타인이고, 타인인데도 가족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
나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약 34년을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젊은 시절에는 어머니께 육아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90이 넘으신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며느리도 보았으니 가족 내에서 시어머니인 동시에 며느리로서 ‘겸직(?)’을 맡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위치에 예행연습도 없이 덜컥 오르게 되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어려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어려워하는 이유는 시대가 변하면서 바뀌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며느리로서 어머니에 대해서 어려워했던 것은 서로 다른 시대 배경으로 인해 겪은 다른 경험이었다.
시어머니 세대는 일제 강점기, 6.25 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세대이다. 이 세대는 학교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가난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여기에 더해서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그 어려움을 홀로 온몸으로 받아내시다 보니 더욱 성격이 강해지신 면도 있다.
베이붐 세대인 우리는 그런 극한의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고, 많은 시간을 학교 공부로 보낸 세대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 공부를 하지 않은 어머니 세대가 답답하고 막무가내로 느껴져서 힘들었다(어머니를 폄하하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그런 까닭에 내가 며느리를 보면 나와 같이 학교 제도를 경험한 세대일 것이므로 어려움이 없을 것을 내내 기대했다.
그런데 내가 시어머니가 되어보니 시어머니 세대와 우리 세대는 그래도 유교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제사가 옵션으로 따라왔고, 시동생이 결혼하기 전까지 7년을 함께 살았지만,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던 것은 개인보다 가족 공동체가 더 중요하고 孝가 제일 중요한 미덕이라는 가치관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같이 맞벌이를 했지만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가사는 여성의 몫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역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동일한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아들 며느리 MZ 세대들은 우리 세대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다.
유교적 가치관이 약화되었고, ‘우리’ 보다는 ‘나’라는 개인주의, 그리고 ‘공평함’이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다. 상담가 이호선이 ‘엑셀 이혼’을 언급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엑셀에 집안일을 목록화하여 기록화하고 이것을 남편과 반반씩 나누어하는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이혼한단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돈을 쓸 때나 집안일이나 매사에 정확히 반반씩 하려는 성향이 확실히 강하게 보인다. 당황스럽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자기표현을 잘하는 것이 미덕이지 우리 세대처럼 침묵이 금이고, 인내 혹은 기다림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세대의 미덕을 강조하면 나는 그들에게 여지없이 ‘꼰대’ 취급받을 것이다. 구세대인 나는 이런 그들이 ‘싸가지’로 보이는 것은 내심 사실이다.
한편으로, 세대 차이와 상관없이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고부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포인트도 보인다.
하나는 ‘말’로 인해서 서로 오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만나다 보니 신뢰가 아직 쌓여있지 않고, 특유의 말버릇에 대한 이해도 없고, 그 인생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맥락이나 말의 의도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어휘 하나하나에 치중하여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작은 농담 하나에도 서로 놀라고, 오해하며 큰 불씨가 된다.
또 하나는 결혼 초기에는 가족 간에 호칭은 어떻게 하는지, 집안 대소사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시부모에게 말대답하는 방식이 어떤지, 시댁에 와서 얼마나 일을 돕는지, 시어른이 방문했을 때 다과나 식사는 어떻게 대접하는지 등 서로 만났을 때 예의나 작은 절차들에서 서로 삐걱거리고 오해한다.
그러나 살아보니 이런 예의나, 절차나, 말실수 등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인생사를 이해할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단지 고부간의 관계를 넘어 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여성 대 여성으로 이해가 되고, 연민을 느끼는 경험을 하면서 관계가 많이 풀리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혈육과 같이 끈적끈적한 관계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고부간에 잘 지낼 수 있는가? 우리의 목표는 인생을 잘(?), 혹은 '별일없이' 살아내는 것이고, 고부 사이에 별일없이 지내는 것이 인생을 별일없이 살아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첫째는 남편과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는 내가 나와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젊은 시절 시어머니에게 불만이 있을 때 (아마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불만이 있을 때) 남편에게 다 털어놓곤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 말을 결코 어머니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큰 싸움으로 번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든 지금 남편은 항상 나의 편이다. 내가 어머니와 관련하여 불만을 털어놓으면 항상 맞장구를 쳐준다. 남편이 확고하게 나를 지지해 준다는 믿음이 어머니를 보살펴 드릴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내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고요할 때, 내가 나와 잘 지낼 때, 허용이 되는 어머니의 힘든 점이 그렇지 않을 때는 폭발한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나를 잘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돌아보니 시어머니와 같이 산 덕분에 두 아들은 시동생 가족까지 포함하여 대가족 안에서 자랐고, 또 그 덕분에 사춘기와 같이 부모만으로는 컨트롤 안 되는 상황을 함께 지혜를 모아서 잘 넘겼다는 생각이 든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다고나 할까. 더불어 시어머니도 며느리인 나를 사랑하고,눈치보고, 견디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며느리 때는 나만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