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친정엄마가 노환으로 입원하셔서 병원에 다녀왔다. 엄마의 연세는 구순 고개를 넘어 후반을 향해서 가시는 데다가 워낙 몸이 약하셔서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하신 모습이었다. 몸 여기저기 링거줄을 휘감고 계셨다. 그 와중에 눈빛만 반짝반짝 빛나시는데 그 눈에는 좌절과 고통이 가득했다.
그런 엄마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목소리도 약하셔서 겨우겨우 하시는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집에 노인이 어느 날 갑자기 개집에 들어가서 안 나오셨단다. 그래서 그 아들이 ‘엄마 왜 그 안에 들어가 계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 엄마가 대답하기를 ‘네가 엄마보다 개를 더 중하게 여기니 내가 차라리 개가 되겠다’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 아들이 깜짝 놀라서 엄마를 모시고 들어가 극진히 대접했다”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엄마는 진지하게 하셨다. 쇠락해 가는 노인의 슬픈 마음이 내 마음에도 저며 들어왔다.
한편으로, 엄마 이야기대로 오늘날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나날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은 ‘孝’였다. 과거 우리나라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고, 기록 문화가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터이라 농사짓는 노하우는 노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니 젊은이들은 노인에게 와서 배워야 했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노인의 위치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반대로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시대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 노인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쓸모없다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쓸모없음. 無用함. Uselessness.
無用함에 대해서 브런치 작가님 한 분이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유명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대사를 인용하셨는데 나도 그 대사를 인용해 본다. “내 원체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이런 것들.”
‘아름답고 無用한 것을 좋아한다.’ 멋진 대사다. 달, 별, 꽃...... 아름다운 것은 無用한 것이 아니라 무한 가치가 있다. 아름답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웃음, 농담도 또한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어린 아기의 웃음은 얼마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가. 부모들은 그 웃음 하나로 인해 아이를 돌보는 모든 수고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無用하다고 여기는 (혹은 우리가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노인에게도 이 말이 해당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노인에게는 표정이 없다. 무표정하거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다. 노인은 많은 경우에 無用하다고 생각되지만 아름답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여기에 노인의 슬픔이 있다.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한 나이와 상관없이 유용한 존재, 쓸모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지 않는가?
탈랜트 전원주 할머니가 한 말이 생각난다. 본인은 며느리가 음식을 해서 집을 방문할 때마다 용돈으로 백만 원씩 준다고. 그렇게 돈을 아끼기로 유명한 사람이 왜 그렇게 큰돈을 주는 것일까? 전원주 할머니에게 그 돈은 자신의 존재,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 능력 있다, 나를 무시하지 말라. 나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암시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노인들이 전원주 할머니만큼 돈이 많지도 않고, 또 오직 돈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좀 씁쓸하게 느껴진다.
나의 시어머니는 전원주 할머니보다 조금 더 연세가 많다. 시어머니도 당연히 인정의 욕구가 강하시다. 뒷방 늙은이 취급받기 원하지 않으신다.
요즘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데 있어서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챙겨드리는 것이 그분께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모든 것을 챙겨드리는 것에는 ‘어머니는 아무것도 못 하신다, 무능하고, 무용하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정부에서 민생 회복 쿠폰을 발행했다. 살짝 불안했지만 어머니께 이에 대해서 알려드리고 주민 센터에서 가서 직접 발급받으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다행히 별일 없이 성공적으로 잘 해결하고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소비 쿠폰을 살림하는데 보태라’는 말을 듣고 뻔뻔스럽게 내가 받아서 쓰고 있다. 이전 같으면 주민 센터에 같이 갔을 것이고 그 돈은 어머니 것이라고 말하며 나의 체면을 먼저 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의 체면보다 어머니의 효능감을 인정해 드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았지만,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다. 집안일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껄끄럽다. 내가 하고 마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러나 요즘은 용기를 내어 나물 다듬기 등 간단한 일을 부탁하는 시도를 애써한다. 노인도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기보다는 본인이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을 때 기쁨이 있고, 생기가 돈다. 움직이실 수 있는 한에는 그분도 기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 드리고, 나도 기꺼이 도움을 받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드셔서 아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시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유용감이라도 발견해 낼 수 있을까? 그분의 역할을 찾아드릴 수 있을까? 그분에게도 기쁘고, 돌보는 자식도 기쁜 일을 발견해 낼 수 있을까?
친정어머니 생각이 난다.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시는 것이 주된 일이시다. 그러한 그분을 뵈면 인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분의 삶자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나침반처럼 보여준다. 이것이 그분의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노인들을 자주 안아 드리라고 하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감히 그렇게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면 이것이야말로 서로가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