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늘 그날이 그날 같아 보이지만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고 변화는 있었다. 친구와의 헤어짐이 있었다. 10년 이상 만난 친구 몇몇과 관계를 끊었다.
한 명도 아니고 몇 명과!! 인간관계가 더 단출해졌다. 직장을 은퇴한 나에게는 친구가 곧 사회생활을 의미했는데 말이다.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외로울 때 함께 산책해 주었고, 고민을 들어주었고, 계절이 바뀔 때 좋은 곳에 가서 함께 즐겼던 추억이 있는 친구들이다. 문득문득 그들이 마음에 스쳐 지나간다. 연말인데 ‘송년 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가 되고, ‘행여 마음에 상처가 깊이 났을까?’ 염려가 된다. 그리고 반성도 된다. ‘내가 이렇게 참을성이 없고, 매정한 사람이었나? 나의 인간성이 겨우 이 정도인가?’ 마음가짐도 다시 해보게 된다. ‘다음부터는 친구 관계에서 싫은 것은 싫다고 그들에게 미리 사인을 보내자. 어느 날 갑자기 쌩하고 관계를 끊는 것보다 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 종일 친구 생각으로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인생의 전부인 10대 사춘기 청소년은 아니지 않은가? 60대에게 친구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 상담 선생님이 그린 동심원이 머리에 떠올랐다. (비슷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임을 밝혀둔다. 그림이 너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을 부디 용서하시길! )
관계에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형제(혹은 친척) 도 있다. 그 관계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있을 때 그리고 더하여 균형 있게 있을 때 인생은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관계의 핵심에는 내가 있고, 나로부터 출발하여 가족, 친구, 형제의 순서가 있고, 관계마다 경계선이 있다. 관계의 순서가 바뀌거나, 경계선을 넘어가면 불편해진다. 설령 가족이라도 나만의 영역에 넘어 들어와 함께 있게 될 때 힘들어진다.
개인적으로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친구’란 가족보다 가깝지는 않지만, 형제들보다는 더 자주 보고 마음을 터놓는 존재이다. 형제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어서 자주 보기도 어렵고, 또 그들도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있으니 공통의 관심사인 ‘친정어머니 건강’ 관련 외에는 점점 연락을 뜸하게 하게 된다. 어찌 보면 우리 형제들은 사랑보다는 책임으로 묶여있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다.
친구는 가족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끈적끈적한 사이는 아니다. 공간을 함께 하는 가족과는 때로는 예의를 지키지 않고도 그냥 넘어가고,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한다. 그러고도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함께 밥을 먹는다. 가족은 운명이니까.
친구들과는 그렇지 않다. 관계의 끈이 느슨하다. 적절한 거리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편하고, 자유롭고, 경쾌하다. 그렇다고 해서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마음도 떠나가므로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성실성은 필요하다. 그러면 가족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을 친구를 통해서 맛보게 된다.
친구를 만났을 때 필요한 정보도 얻고, 마음껏 수다도 떨고, 때로는 혼자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생산적인 일도– 그것이 여행이든, 공부든, 봉사든- 함께 할 수 있다.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래위로 다섯 혹은 열 살까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구와의 관계는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관계이다. 혹시라도 친구가 대화 중에 나에게 부당하게 언성을 높인다면 몇 번은 참아 주겠지만 그것이 계속된다면 결국은 그 관계는 끊어질 것이다. 혹은 만났을 때 일방적으로 한 사람만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해야 할 때도 관계는 끊어지는 쪽으로 가게 된다. 만남이 지루하거나 약속을 자주 어기게 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관계를 끊으려 하는지 이유는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고 조용히 연락을 끊게 된다. 구체적인 이유를 말할 에너지는 없다. 60여 년을 살면서 속내를 모두 다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것에 훈련이 되어왔다. 또 이 세월까지 살면서 자식에게서, 혹은 남편에게서, 혹은 연로하신 시모에게서 이미 마음의 바닥까지 가 본 경험을 하며 살아왔다. 친구와의 관계에까지 인내심을 발휘해서 유지할 열정은 점점 없어진다. 친구와의 관계는 너무 무거워지고 싶지 않다. 만나면 즐겁고 헤어질 때도 가벼운 마음이고 싶다.
온라인을 통해서 같이 책을 읽고, 한 달에 한번 만나서 전시회나 영화를 보는 모임이 있다. 지난 주말에는 연말이니 만큼 간단한 선물도 주고받고, 맛있는 밥도 먹고, 수다도 떠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날마다 보거나 연락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가정사를 시시콜콜히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과 오래간다. 아마도 그 이유는 마음의 선 (혹은 예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을 적절히 지켜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 만나서 즐겁고 또 에너지를 받아와서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들에게 한 번 더 웃어줄 수 있게 하는 사이. 이것이 60대의 친구가 아닌가 한다.
또다시 한해를 흘려보낸다. 묵은해를 보내면서 집안 정리도 한번 하고, 마음 정리도 한번 하고,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그동안 좋았지만, 그리고 앞으로 생각나고 그리워할 수도 있겠지만 보낼 사람은 떠나보내고 또 새롭게 만날 사람을 기대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