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며칠 전에 국가 건강 검진을 받았다. 건강 검진은 직장 생활하던 20대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을 받았지만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해 왔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건강 검진 며칠 전부터 긴장이 되었다.
건강 검진에서 제일 긴장되는 것은 마지막에 하는 위내시경이다. 올해 위내시경은 ‘수면’으로 했다. 단 몇 분밖에 안 걸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위내시경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그 고통을 견디는 인내심이 이제는 바닥이 났다.
수면 내시경은 추가로 10만 원을 더 내야 한단다.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받지 않는 대가라고 생각하니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다. 진행의 차이점으로는 일반 내시경을 할 때는 나의 위 상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면서 진행을 하는데 수면 내시경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끝난 뒤에 직원이 아무 표정 없이 딱 한 마디만 했다. 조직을 떼어내서 조직검사를 해야 하니 추가 비용을 내라는 이야기.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덜컥 겁부터 났다. ‘왜 조직을 떼 내었지?’
혹시 악성 종양인가? 위암 가족력이 있고, 게다가 최근에 새벽마다 위가 쓰려서 깨는 경우가 잦았던 터이다. ‘악성 종양이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주변에 유방암, 갑상선암, 자궁암, 위암 등 다양한 암에 걸렸다가 건강하게 회복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설령 내가 암에 걸렸다는 결과가 나와도 대단히 특이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나만 안 걸리고 반드시 예외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다’라고 마음먹으니 조금은 편해졌다.
‘앞으로 나는 건강 검진을 몇 번을 더 받을 것인가?’
나의 시어머니 경우를 보면 연세 80을 넘어서는 건강 검진을 받지 않으셨다. 그 연세가 되면 암이 발병하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시겠다는 마음이 생기나 보다.
국가 건강검진은 2년에 한 번 받는다. 그리고 만약 나도 시어머니의 경우를 따른다면 건강 검진을 받을 일은 이제 채 열 번도 안 남았다. 물론 사람 생명은 알 수 없으니 만약 80 이전에 세상을 떠난다면 더더욱 몇 번 남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꼭 살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반드시, 반드시, 죽어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장성하여 떠났고, 각자 그들만의 땅에 뿌리를 내렸다.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90대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두 분이다. 그분들은 세상과 커뮤니케이션은 물론이고, 자식과도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안 된다. 그분들을 아주 절절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친정어머니의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슬프고, 안타깝지만 너무나도 늙고 쇠약해진 현재 모습을 보면 낯설다 못해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보다 내가 먼저 떠나면 너무 슬퍼하실 것 같다. 그분들을 보내드리는 것까지는 나의 책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연세 90을 진작에 훌쩍 넘기셨으니 어머니들 핑계를 대서 반드시 오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물론 사랑하는 남편이 있긴 하지만 남편 때문에 반드시 오래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기는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없는데 요즘 건강에 대한 염려가 부쩍 많아졌다. 건강 염려증 환자 수준이다. 집에 있으면 건강 관련 기사는 매일 한두 건은 꼭 클릭해서 보고 또 그 기사에서 나오는 대로 따라 한다. '커피는 하루에 몇 잔 이상 마시면 안 되고, 아침 식사는 무엇으로 해야 하고.......’.
외출할 때도 햇볕에 눈이 노출되어 행여 백내장이라도 걸릴까 봐 색깔을 넣은 시커먼 안경에,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내 모습이 마치 死神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슬금슬금 몰래 다니는 도망자의 모습이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오래 살고 싶냐고.
‘억울하잖아? 지금까지 인생, 의무로만 살다가 해외여행도 제대로 못 해보고 세상과 바이 바이 하면? 남들 다 가는 하와이도 못 가봤잖아? 스위스가 그렇게도 좋다는데 스위스도 못 가봤잖아?’
나에게 다시 물었다.
‘죽기 전에 해외여행 원 없이 다녀오면 억울하지 않겠니? 죽어도 원이 없겠니?’
여기에는 답이 없었다.
오늘 아침, 새벽에 한번 깨긴 했으나 그래도 잘 자고 일어났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싱그러웠다. 바람에 봄이 함께 실려 왔다.
친구랑 꽃구경 갈 약속이 되어있었다.
[ 친구와 힘께 간 창덕궁 후원의 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아직 못 찾았다. 그러나 생명이 요동치는 이 봄을 좀 더 누려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마음 저 깊이에서 올라왔다.
그렇다. 건강하게 삶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은 욕망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태어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나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초연히 떠날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한다. 원 없이 사랑했고, 사랑받았으므로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마음으로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다만, 이 아름다운 세상, 사명을 다하고, 삶을 누릴 힘이 없을 때가 오면 삶의 끈을 질기게 붙잡는 과욕을 부리기 전에 하늘에서 데려가시길 바란다. 남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 아까운 사람이 떠났구려!’하며 아쉬움이 남아 있을 때 떠나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