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장래 희망이 뭐냐?”
“커서 뭐가 되고 싶냐?”
라는 질문을 많이 듣고 자랐다.
요즘 아이들도 그런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그 말을 끊임없이 들었던 나는 직업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직업을 통해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많이 애쓴 시절이었다. 직업을 세 번이나 바꾸었으니 말이다. 회사원에서 대학 강사로 그리고 외국에서 한국어 강사까지.
그러나 60대인 지금, 이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학위 취득을 했으나 그 학문은 현재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는 사례가 있으니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직업을 통해서 얻은 것은 첫째로 경제적 수입이다. 부수입으로 참는 것을 배웠다. 모난 돌이 정을 맞아 둥글어진 셈이다.
그리고 이제 일을 그만둔 지 올해 5년 차다.
5년 차가 되니 먼저 일을 그만둔 선배들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은퇴 선배는 말했다. 은퇴 첫해는 너무 행복하다. 그러나 3년 차부터는 심심해지면서, 5년 차가 되면 자신의 존재감이 희미해진다고.
정말 그렇다. 일을 안 하기 시작한 첫해는 그 자유로 인해 날아갈 것 같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행복이라고 할까.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서 이것저것 마음껏 배우기 시작했다.
5년 차가 된 지금은 배우는 것도 조금씩 시들해졌다.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해서 병원에 다니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났다.
아들이 맞벌이하는 까닭에 손자녀를 키우는 돌보는 대기조가 되었다.
어린 손녀를 돌보는 것은 인생 최고의 기쁨이지만 하루 같이 신나게 놀고 나면 몸을 회복하는데 이틀이 걸린다.
직장 생활하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이 있다.
그러나 가정에만 머물면 혼자 책을 읽고, 애를 써도 결국 직접 맞부딪치는 세계가 집 안으로 한정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시야가 조금씩 좁아지는 것이다.
한편 직장 생활은 지나갔지만, 주부로서 밥 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직장 생활은 짧고 밥은 영원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잠시만 방심하면 금방 몸이 찌뿌둥해지고, 마음은 우울해진다.
물론 직장 생활해도 우울할 때가 있고, 몸이 안 좋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직장 생활할 때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감정에 오래 머물 틈이 없었다. 은퇴자에게는 많은 사건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오래 거기에 마음이 머물게 된다.
어떤 일이든 구해서, 어떻게든 다시 사회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일해서 버는 돈이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 빠른 ‘엔도르핀’이다.
다시 사회로 복귀하고 싶다는 유혹이 느껴지는 때는 가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이다.
출가한 자식에 대한 걱정, 섭섭함에 내가 너무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연로하신 친정어머니, 시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좌절감이 깊어질 때, 직장 생활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직장을 다시 구해서 다니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나를 다독여보기로 한다. 지금의 삶에 어떤 행복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은퇴자에게만 주어지는 역할이 있고, 은퇴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있다는 것도 점점 알게 된다.
노모의 건강, 안부를 챙기는 일.
맞벌이하는 자식이 바쁠 때, 손자녀를 돌보는 일.
이런 일들은 힘들긴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 이 나이 사람들의 사명일지도 모른다. 이 일은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남편은 지난겨울 마을 봉사 대원으로서 눈이 온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길거리 청소를 해서 출근하는 사람들이 힘들지 않도록 도왔다. 출근에 부담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직장 생활은 안 하더라도 은퇴자가 할 수 있고, 감당해줘야 하는 사회봉사인 셈이다.
은퇴자만 누릴 수 있는 혜택도 있다.
주말은 직장 다니는 이들에게 양보하고, 평일에 조용하게 마음껏 다닐 수 있다.
느긋한 브런치, 대낮의 한가한 수영장, 고요한 숲, 고즈넉한 고궁들, 여유로운 미술 전시회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장례식 참여와 같이 갑자기 생긴 일에도 대응하기 좋다.
(60대에는 결혼식, 장례식에 참석할 일이 많다.)
'내가 과거에는 어찌했는데......' 하고 말하면 초라해진다. 지금 여기서 좋은 것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모아 모아 행복해지는 사람이 위너다.
어쨌든 아침에 애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 이것만 해도 행복하지 아니한가? 다시 오지 않을 이 날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