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주호민에 대한 연민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
I 서론
요즘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주호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와 연관되어 있는 사건의 발단은 대략 이렇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선생님에 대한 제도적 보호장치가 부족한 업무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교사의 처우 개선과 교권 보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한 매체에서 자폐성향을 가진 아이의 학부모인 유명 웹툰작가가 아이의 선생님을 아동학대로 신고했다는 기사가 올라왔고 이 아이가 주호민 씨의 아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바로 이전에 일어났던 한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한 학부모에 의해 한평생 헌신해 온 자신의 일자리를 잃게 된 교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한 교사의 인생을 바친 헌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이는 유명 웹툰 작가에 대한 분노로 급격하게 번져나갔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주호민이라는 한 인간이 저지른 과오 보다, 그의 과오에 대해 반응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에 관한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내가 생각하는 '과오' (하마르티아)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II 과오 (하마르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 (peri poietikes)에서 좋은 비극의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좋은 비극이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 (ἔλεος, 엘레오스)과 두려움 (φόβος, 포보스)을 일으키고, 그것을 해소시킬 수 있어야 한다 (Poet. 1149b27f.). 이 시학에서 좋은 비극의 예시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König Ödipus이다. 이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비극을 위한 비극적 인물의 특성을 잘 나타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은 1) 악하지(κακία und μοχθηρία) 않아야 하며 2) 하마르티아* 때문에 (δί άμαρτιαν τινά) 행복에서 불행으로 빠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가장 큰 연민과 공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마르티아란,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는 뜻의 동사 하마르 타네인ἁμαρτάνειν에서 유래한 단어로, 즉, 행위자의 행위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상황에 쓰인다. 하마르티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에서 말한 ‚무지 안에서 (ἄγνοῶν)‘ 하는 행위와 같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술 취한 사람의 행위에 비유한다. 무지 안에서 하는 행위는, 행위자가 보편적으로 어떤 행위가 옳은지에 대해 알고 있지만 성격적 결함 (예를 들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올바른 행위를 하지 못하는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오이디푸스도 자신의 욱 하는 성격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관객이 비극을 보고 연민을 느끼냐는 점이다. 왕에서 한 순간에 눈먼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삶은 충분히 공포스럽지만 어째서 그의 과오로 인한 비극적 결말이 사람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인가? 그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과오의 결과가 너무 과분한 (άνάξιος)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Poet. 1453a4). 이 문장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관객이 비극의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불행에 대해 주인공이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과오에 비해 너무 큰 불행을 겪기 때문이다.
III 주호민의 과오
내 생각에, 주호민 씨 부부가 저지른 가장 큰 과오는 그들이 '절차'를 무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에게서 평소와 다른 점을 느꼈다면 먼저 교사나 학교 측과 대화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아이의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서 등교시키는 불법행위 (타인의 동의 없이 대화를 녹음)를 저질렀고, 이후에도 이 사건의 당사자인 교사와 대화를 한 것 이 아니라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해 버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몇몇 절차를 건너뛴 주호민 부부의 조치는 이후에는 너무도 '절차대로' 교사를 직위해지 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부모의 '아동학대' 혐의 신고만으로 교사가 바로 직위해제 된다는 시스템은, 사건의 이유나 원인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전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하는 것 같아서, 매우 비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이 비합리적인 시스템은 우리가 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했던 교사를 전혀 지켜주지 못하는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연관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은 아쉽게도 이번 사건 역시, 지난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던 몇몇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생긴 시스템에 대한 관심보다는 과오를 저지른 행위자를 비난하고 짓밟는 데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IV 한국사회가 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니 뭐니 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특정 대상을 평가하는 것을 지양하려고 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인식하고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개념'이라는 보편적인 것이고 실제 사회를 구성하는 대상들은 '한 명의 한국사람'이라는 개별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추론한 '한국 사회'로 특징지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어두운 단면은, 어떤 사건이나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의 원인이 한 개인에게만 달려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원인을 행위자 한 명에게 몰고 (사실은 그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그 사람의 과거를 행적을 하나하나 드러내서 악마화시킬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평판을 바닥으로 만들어 다시는 그가 지금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에만 온 역량을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주호민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교사가, 교사라는 직업의 가장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교권도 보장할 수 없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주호민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인지, 그의 정치성향이 어떤지, 그의 과거 발언이 어떠한지를 들추어낼 뿐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보다 주호민이라는 사람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자폐 성향을 가진 그의 아이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그 행위를 자폐성향을 가진 아이가 아닌,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이름 붙이고 평가하는 데에 더 큰 시간을 할애한다.
V 결론 (하고 싶은 말)
나는 주호민 씨 부부가 비판받을만한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으며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그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행동에 대한 책임과는 다른 이야기다.
군대를 전역한 사람들이 '나 때는 이런 부조리가 있었는데 나 나올 때쯤에 다 없어졌어'라고 말해도 부조리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부조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그들을 막을 수 없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다른 인간에 의해서 비극은 계속된다.
10년 넘게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를 키워 온 주호민 부부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한 행위가 절차적으로 잘못된 행위라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들이 한 조치 (왜 그들은 선생이나 다른 학부모와 대화하기보다 직접적으로 녹음기를 통해 녹음을 하고 교사를 고소할 생각을 하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 주호민의 인간성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도적 장치로 선생님들의 교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주호민 부부가 아니라 그 누가와도 똑같은 일은 반복되고, 결국 개선되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피해를 입는 아이와 선생님들은 더더욱 늘어날 것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건설적인' 이야기란, 현재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에 기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말한다. 주호민 부부의 과오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자신들의 과오로 인해 겪고 있는 그들의 불행이 너무 크다고 느껴진다. 주호민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인간 주호민과 그의 가족이 사회에서 겪을 불행에는 연민이 느껴진다. 이 두 가지가 모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디 행위자를 제물삼아 감정을 배설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어떤 행위자든 동일한 과오를 저지를 수 없도록 하는 것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