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게도 산만한 소년
올해도 어김없이 받아 들게 된 소년의 생활기록부에는
또다시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산만하다'라는 평가가.
소년의 산만함에는 물론 장점도 있었다.
어떤 단어를 들으면 머릿속에는 그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연관단어들의 마인드맵이 펼쳐졌다.
그리고 떠오른 수십 가지의 엉뚱한 대답은
다른 사람들은 잘 떠올리지 못하는 기상천외한 대답들이었고
그렇게 소년은 남들에게 항상 '웃음'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산만한, 너무도 산만한 소년은
그의 산만함 때문에 잃은 것이 더 만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엉키다 보니 방금 전에 생각했던 내용은
새로운 생각의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가기 일쑤였고
중요한 계획이나 물건들도 생각의 파도 앞에서는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형태를 잃어갔다.
그렇게 원치 않던 이별을 맞이해야만 했던
도시락통과 체육복들을 생각하며 소년은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찾은 구원의 동아줄은 '계획'이었다.
여행이나 시험 전엔 항상 계획을 한 뒤 움직였다.
시험공부보다는 계획이 먼저였던 소년은
그렇게 대학에서는 장학금을 휩쓸었고
꿈에 그리던 전액장학금을 받고 조기졸업을 하는
최고의 마무리를 해냈다.
남들보다 빨리 졸업해 버린 시간엔
마치 시험공부를 하듯
치밀한 계획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고
디테일하고 물 샐 틈 없던 그의 편집증적인 계획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모든 긍정적이었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소년을 계획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사막의 원숭이와 여우 이야기를 아는가?
사막에서 나름대로 잘 살고 있던 여우는 어느 날 원숭이를 만나게 되고
원숭이는 여우에게 신발을 선물한다.
여우는 자기는 신발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원숭이는 자신의 호의가 담긴 선물이라며
신발을 건넨다.
그렇게 호기심에 신발을 신어 본 여우는 그 뒤로 신발의 편안함을 알게 되고
신발 없이는 사막을 걸어 다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제야 다시 나타난 원숭이는 비싼 가격에 신발을 팔겠다고 하지만
이미 신발의 노예가 돼버린 여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신발을 사야만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의 것들이
가랑비처럼 내 몸을 적셔서 내 몸에 스며들고
그렇게 어느새 나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그것 때문에
나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이 '그것'의 이름은
내게 한줄기 구원의 빛이었던 '계획'이다.
그렇게 나를 산만의 늪에서 구원해 줄 수 있을 것 같던 '계획'이라는 동아줄은
어느새 내 몸 전체를 묶어버렸고
나는 '계획'이라는 새로운 늪에 빠지게 된다.
아, 당신은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