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명문대 이데올로기"
우리 사회의 이른바 "학벌 만능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뤄져 온 주제이다. 그래서 이 주제를 의미 있게 다루려면, 조금은 지엽적으로 글의 방향성을 설정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소위 "명문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명문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해결방안에 대해서만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명문대 이데올로기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란, 보통 SKY로 대표되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그리고 IVY리그에 속해있는 미국 대학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한국의 초, 중, 고 교육은 보통 이런 좋은 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학 입시가 결정되면, 고등학교에서는 교문에 '이 학교에서 몇 명의 명문대 생이 배출되었는지' 큰 현수막을 걸어 광고를 한다.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등학생들은 집보다 학교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심지어 새벽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학에 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주변의 기대는 끝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고통받고, 견디지 못하는 경우에 마음의 병이 생기거나 목숨을 끊기도 한다. 수학 능력시험이 치러진 날 '성적에 비관한 학생이 목숨을 끊었습니다'라는 안타까운 뉴스를 우리는 이미 많이 봐 왔다. 나이가 조금 들어서 돌이켜보면, 보통의 학생들은 이 나이에 그러한 부담감을 견뎌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입시라는 틀에 맞춰져서 자신들 각자의 모양을 바꾸길 강요받는다. 이렇게 길러진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명문대를 들어간 사람은 남들보다 더 노력을 한 뛰어난 학생이고, 인정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에 잠식당한다. 명절이 되면 어른들은 "어느 대학 갔니?"라는 말을 물어보고, "누구는 명문대 갔다더라" 등등 비교를 한다. 끝없는 비교 속에서 "명문대 학생"은 하나의 명예로운 특권이, "비명문대"나 소위 "지잡대"는 낙인이 되고 족쇄가 된다. "학벌주의"에 대한 논의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문대 간 학생들은 그만큼 노력해서 명문대에 간 거야. 그들이 자신의 노력에 대해 보상받는 게 뭐가 나빠?
맞는 말이다. 나 역시 그들이 노력으로 인해 받은 보상이 없어져야 한다거나, 모든 대학이 평준화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내가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주제는 따로 있다. 나는 -대학 졸업장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대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가 한 사람을 파악하는 중요한 기준처럼 작동하게 되는지, 인간 무의식에 숨어있는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 명문대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자리 잡은 방식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기본적 정의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말한다: "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행한다).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마치 ~인 듯이 als ob'라는 가정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마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듯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사회의 '명문대 이데올로기'를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한 인강 강사가 유튜브로 학생들과 소통하던 도중, "'수리-가' 형에서 7등급을 받은 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 것이며, 그러게 할 거면 '지이잉' 호주로 가서 용접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녀에게는 "용접=공부를 안 한 사람들이 하는 직업"이라는 직업에 대한 비하 의식이 있었다. 입시 교육에서 필요한 공부와 용접공이 되기 위해 요구하는 것은 다르다. 용접공은 용접 기술을 배워야 하고, 명문대에 가려면 그에 상응하는 수능 점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녀는 "공부"를 "대학교 입학을 위한 공부"만으로 한정 지어서 생각하고 있고, 용접은 명문대 생들이 하는 방식의 노력을 하지 않거나, 그러한 능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용접과 대학입시에 필요한 것의 종류가 다를 뿐, 둘 다 원하는 목표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내가 더 흥미롭게 본 것은 그녀를 비판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용접공 비하해서 뭐 서울대 연고대라도 나온 줄 알았더니 중앙대 나와서 용접공 비하하고 있네 ㅋㅋ"
특정 직업군을 비하하는 그녀를 비판하는 댓글 중 추천을 많이 받은 것 중 하나가 놀랍게도 그녀의 문제 되는 생각과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댓글을 쓴 사람과 이 내용에 공감한 사람들은
입시의 결과 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사람을
명문대를 나온 사람만이 명문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을 비판할 자격을 갖는다 라는 생각을 근거로
입시의 결과 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비판하지 마라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명문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명문대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을 비판하지만, 그 비판의 근거는 그들이 가진 '명문대 이데올로기'다. 저 강사가 특별히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명문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3. 명문대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방법
명문대를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학업 성취도나, 학창 시절의 노력을 보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거나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명문대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정말 남들보다 뛰어난지 확인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라는 무의식적 편견을 더해갈 뿐이다. 명문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실 명문대 졸업장은 그 사람 자체를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만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참고 문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