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정의 구현인가
린치는 18세기 미국에 사법 체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때 버지니아주의 치안판사 겸 농장주인 찰스 린치가 흉악범이나 정적들을 사적(私的)으로 처형하려고 동원환 관행인 '린치 법(Lynch law)'에서 유래했다. 즉, 당시 보안관이나 법원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질서 유지를 위해 범죄 용의자를 대중의 동의만으로 처벌한 관행이 바로 린치였다. 그러다 1860년대 미 남북전쟁을 전후해서는 백인들이 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출처: 네이버 시사상식 사전
최근 인터넷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계속 차지했던 내용들이 있다. 한 유명 셰프와 결혼을 앞둔 외주제작사 PD의 과거 이력과 자살시도, 그리고 유튜브에서 유명한 약사의 문란한 사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비슷한 사건들은 최근뿐 아니라 과거에도 많이 있었다. 이른바 '얼짱'으로 유명했던 한 쇼핑몰 대표가 사실은 친구들을 괴롭히던 '일진'이었다던가, 방송에 출연해서 인기를 끌었던 연예인의 매니저의 과거 행실 등등... 예시 만으로도 글을 몇 장 쓸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내가 이전부터 가졌던 생각을 이 기회에 써보고자 한다. 글을 쓰기에 앞서,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민감한 주제인만큼,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명확히 하고 싶다. 나는 이 글에서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른바 '사이버 린치'라는 현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사이버 린치'란 인터넷 상에서 댓글이나 게시글로 한 사람에게 지속적인 비난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글은 '사이버 린치'가 "절차상 정의"에 부합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하는 글이며,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의 인물들이 했던 행위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사건들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았으므로 사건에 대한 확실한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까지 기다려 보자는 입장이지만, 논란의 내용이 사실일 경우 당사자들이 법률적이 아니더라도 도덕적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즉, 이 글에서 사이버 린치의 대상자들의 잘못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들이 했던 행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글이 아님을 밝힌다.
무한도전 가요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규모가 커지자 매우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공연을 보고 간 관객들이 많은 양의 쓰레기를 버리고 뒤처리를 엉망으로 하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많은 댓글들이 달렸는데 그중 공감을 많이 받은 댓글 중 하나가 선명히 기억난다: "이제 방송 나오면 그 새끼들 얼굴 좀 보자. 도대체 어떤 새끼들이 그렇게 개념 없는 놈들인지"
나는 이 글을 보면서 공감이 가기보다는 섬뜩했다.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킬만한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처벌의 무서움을 이미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자신의 반려견의 대변을 치우지 않은 이른바 "개똥녀"사건부터, 식당에 똥 싼 기저귀를 버리고 간 "~맘", 그리고 사람들의 경멸이 담긴 닉네임으로 불리는 수많은 "~충"들. 인터넷에서 공론화된 사건의 당사자는 먼저 신상이 털리게 된다. 그다음 인터넷으로 수많은 욕설을 듣고, 일상생활에서도 학교나 직장, 그리고 주변 인간관계에도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 들의 시각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들은 잘못을 했으므로,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당한 고통은 피해를 입은 사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받는 것은 정당하다.
와 같은 생각이다.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불편함을 느꼈는데, 첫 번째로 내가 https://brunch.co.kr/@akrates/4 (영화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불행의 이유에 대한 글)에도 썼듯이 자신의 과오에 대한 처벌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처벌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측면이 이 글의 주제기도 하다) 인터넷을 통한 집단 린치라는 처벌 방식이 과연 정당한 방식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인터넷 집단 린치의 대상이 되는 사건들은 보통 "누구나 당할 수 있을 법한" 사건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감과 공분을 이끌어내기 쉽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에서 억대의 돈을 횡령한 사건과, 인기 있는 연예인이 사실 과거에 친구들 돈을 빼앗고 폭력을 행사하던 일진이었다는 사실이 같은 시기에 드러났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일에 사람들의 관심이 더 쏠릴까? 정답은 후자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건은 일반 시민들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아마 횡령한 돈에 나의 예금이 포함되어 있다면 앞의 사건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있겠지만 인기 연예인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던 인물이 사실 일진이었다는 것만큼의 관심을 얻지는 못한다. 일진은 학창 시절 우리 기억 속에 한 명쯤 있으며, 일진에 의한 괴롭힘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내 가족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받던 사람들의 추악한 과거가 드러나는 경우, 이들에 대한 비난에는 "누군가 말하지 않았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라는 괘씸함이 추가된다. 게다가 이들이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너의 행실대로라면 넌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라는 분노가 쌓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인터넷을 통한 집단 린치가 가해지는 원동력이 린치를 가하는 사람들의 '자의적 정의감'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경우에 인터넷 린치가 가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동의를 얻은 규정은 없다. 그러므로 린치가 가해지는 사건의 규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적정' 수준의 공분이 있으면 린치가 시작되지만, 그 '적정' 수준은 아무도 모른다. 문제는 린치의 시작이 린치를 가하는 사람들의 '자의적 해석'에 의존하기 때문에 "실제 그 사건의 가해자가 현재 린치의 대상이 맞는지?" 혹은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인지?" 아니면 "일부 악의를 품은 사람들의 음해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먼저 시작되고 본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인터넷 유명 방송 DJ의 이름이 'N번방 가해자'리스트에 있다는 소문이 트위터로 급속히 확산되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글을 처음 올린 사람은 '자신의 실수였다'며 사과했지만 해당 BJ의 이미지는 이미 손상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린치는 '정의구현'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무고한 피해자들은 나중에 정의를 위한 주춧돌 정도로 치부된다. 마지막으로, '어디까지 린치가 가해져야 하는가?'도 적절한 기준이 없다. 어떤 경우에는 당사자의 사과까지 린치가 계속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당사자의 죽음 뒤에야 린치가 끝나게 된다.
인터넷을 통한 집단 린치는, 법률적 처벌의 강도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한국사회에서 '다른 방식의' 정의구현 수단으로 인식되어 온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린치는 정의구현인가? 그렇다면 그 정의는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