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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크라테스 Sep 14. 2020

'이런게 노무현 정신이죠!'

2020년의 한국, 계몽이라는 신화

*이 글의 목적은 편 가르기가 아니다. 나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으며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기에), 단지 현재의 한국 사회에 대한 아쉬움과 맹목적인 열성 지지자들이 가지는 모순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현 법무부 장관인 추미애의 아들과 관련한 문제가 제기된 이후로 국민들은 마치 박근혜 정부 때의 '국정농단 사태'나 문재인 정부의 '조국 사태' 때와 비슷한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그 와중에 한 국회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추미애 아들에 대한 제보를 한 사람의 실명을 거론했고, 그 실명을 본 국회의원 지지자 + 당의 지지자들은 댓글로 테러를 가하는 중이다. 문득 이 현상이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서 이에 대해 글로 정리해 볼까 한다.  


1. 계몽의 변증법 


계몽 Aufklärung이라는 개념은 이전 시대와 자신들의 시대를 구분 지으려는 근대인들의 태도와 매우 깊게 관련되어 있다. 독일어로 '새로운 시대'라는 뜻을 가진 근대 Neuzeit에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를 추구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인간이 더 이상 자연이나 신에게 의존적이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이성이나 합리성을 통해 이전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계몽된 사회에서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주체성을 가지며, 주체성은 타인의 지배나 간섭으로부터 침해되지 않고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자유가 바로 계몽의 목표였다.

계몽의 과정은 믿고 있던 환상이 깨지는 '탈주술화 / 탈마법화' Entzauberung의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계몽의 탈주술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계몽의 결과는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다. "왜 계몽된 세계에서도 야만성은 사라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기했던 핵심 질문이었다. 그들이 이 책을 집필했을 때 그들에게는 '나치'라는 매우 확실한 예가 있었다. 왜 매우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이성으로 계몽된 (사실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나는가? 나치즘은 하나의 신화와 같다. 왜냐하면 하나의 매우 비이성적인 신화 (예를 들면 금발의 아리아인의 민족적 우수성)를 통해 사람들이 '나치즘이 그럴듯하다'라는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테제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신화는 그 자체로 계몽이다 Der Mythos ist selbst die Aufklärung

2) 계몽은 신화로 귀결된다 Die Aufklärung kommt auf den Mythos hinaus 


이 순환적으로 보이는 두 테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겉으로 보기에 신화와 계몽은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신화는 사실 계몽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원래 주술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자기 자신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다). 그리고 자기 보존 욕구 conatus로 인해 인간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주술의 역할은 바로 공포의 극복이다. 예를 들어 주술사들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때 악마를 따라 한다. 이것을 모방 mimesis라고 한다. 이러한 모방을 통해 주술사는 공포의 대상과 비슷해지며, 공포의 대상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된다. 낯선 것은 이러한 모방 이후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신화 Mythos는 주술 Zauber과 다르다. 신화의 역할은 자연현상의 설명이었다. 주술과의 공통점은 신화 역시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개기일식 같은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신화로 없앨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이 신화로 설명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기일식이 사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분노로 인해 생기다든가). 그러나 신화는 자연현상을 설명할 뿐 아니라 계몽의 시도이기도 하다. 호머의 설명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이렌의 노래에 대한 키르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는 이를 피하지 않고 사이렌에 맞선다. 그는 자신의 몸을 배에 묶고 귀를 밀랍으로 막은 뒤 혼신의 힘을 다해 사이렌의 위협으로부터 빠져나간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인간의 주체성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주술과 신화의 차이가 다시 한번 드러난다. 주술사는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술사가 있던 시대에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 속에서 인간은 두려움의 대상을 모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마치 오디세우스가 그의 기지로 역경을 이겨냈듯이, 스스로 그 대상을 극복하려고 한다. 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주체성이 바로 계몽의 가능성이다. 이것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신화가 그 자체로 계몽이라고 말했던 이유다. 

그러나 이 주체성은 야만의 씨앗 역시 품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계몽 덕분에 더 이상 종교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은 더 이상 신화의 시대 때만큼 중요하지 않고 인간이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주체가 되었다. 자연은 이 관계에서 하나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신의 형상과 비슷한 인간들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으며 (베이컨이 말했듯)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자연에 대해 공포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법칙을 이해했다고 믿고 자연을 이용한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과 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 자연은 순수한 객체가 되었다. 자연의 본질은 지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지배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지배로 나아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계몽의 프로세스는 두려움의 근원이었던 객체를 주체가 지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계몽은 어떤 시스템 보다도 전체주의적인데, 왜냐하면 계몽이 '동일성의 논리 Logik der Identität'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논리 아래에서 대상의 질적 차이나 특별함에 대한 인식은 언급되지 않는다. 다양한 대상이 개념을 통해 통일화되고, 우리는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개개인이 각각의 다양한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차이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일성의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성 Totalität'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시스템에 들어맞지 않으면 그것은 시스템에서 제거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개별성은 이러한 시스템에서 논외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전체성 속에서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한다. 

신화는 다른 것에 대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계몽의 역할이 바로 이러한 '지배의 정당화 die Rechtfertigung der Herrschaft'이다. 지배의 정당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들이 계몽되었다고 착각한 사이 새로운 신화가 계속해서 쓰인다. 나치즘이나 파시즘 같은 야만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계몽된 시대에 나치즘이라는 신화 역시 금발의 아리아인 (혹은 독일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나다는 확신에서 나왔다. 시스템에 맞지 않는 열등한 것들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제거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러한 이유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신화가 그 자체로 계몽이고 계몽이 신화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은 계몽에 의한 판타지다. 왜냐하면 계몽은 지배와 관리의 기술 중 하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몽'이라는 신화가 위험한 이유는 누군가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집단이 '계몽되었다'라고 인식하는 순간 자신이 가진 사상이나 도덕성 등이 타인이나 타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고 제거하려는 데에 있다. 


2. 촛불과 계몽 


사라예보에서의 총성 한 발로 1차 대전이 시작되었듯, JTBC가 발견한 태블릿 PC 하나가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결과까지 이어졌다. 광화문 광장을 촛불로 가득 채운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엄청났다.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줄 알았던 대통령이 사실은 개인과 주변인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었다. 권력자들과 그 주변인이 누리는 엄청난 특권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사회의 불공정함에 치를 떨었다. 독재정권 이후로 사회가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믿었던 국민들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는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예능 프로그램보다 시사에 대해 토론하는 방송이나 국회의 청문회에 더 관심을 가졌다.  

청문회를 보면서 정말 화가 났던 것이 바로 '법'을 아는 사람들의 답변태도였다. 그들의 답변은 똑같았다.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수사 중이라 답변하기 힘듭니다", "검찰 조사에서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법적인 처벌을 피하기 위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자아 동일성을 '기억상실'이라는 전략으로 지워버리고자 했다. 그들은 책임귀속을 피하기 위해 기억뿐 아니라 일말의 양심도 지워버렸다. 도덕성 따위는 없었다. 권력은 특권뿐 아니라 책임이지만 그들에게는 오직 특권을 누리는 것만 중요해 보였다. 

청문회와 연설, 재판 과정들을 보면서, 당시의 나는 이른바 정치적으로 '보수'라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 착각이 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고 알게 되었다. 권력자/기득권 층의 뻔뻔함은 진보/보수, 여/야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그 특권을 누리려면, 가장 필요한 덕목이 '뻔뻔함'이었다. 음주운전을 하면 가중 처벌을 받는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은 정작 자기 자신이 음주운전을 하고 적발되었다. 이름에 '정의'가 들어가는 당에서는 비례대표 1번으로 대리 게임 등의 편법을 쓴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만들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소위 명문대에서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치며 기득권의 특권의식을 비판했던 사람은 자기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묵비권은 보장된 권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한 사람은 수많은 사퇴 압력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다른 국회의원들의 도덕성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 2016년, 박근혜 정권에서 수많은 권력자들의 특권의식에 치를 떨었던 국민들은 '적폐 청산'을 부르짖는 당시의 야당에 자신들의 투표권을 행사했지만 2020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적폐의 청산'이 아니라 '새로운 적폐'이다. 집권여당이 바뀌고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다.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16년의 우리는 코너링을 잘해서 뽑혔다는 운전병에 분노했고 2020년의 우리는 부모가 전화해서 탈영이 휴가 연장으로 둔갑한 사연에 분노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특권 계층은 일반 국민들이 기대하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2020년, 나는 국민들이 힘을 모아 대통령을 탄핵하고 가졌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마치 계몽처럼,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었다는 현실에 힘이 빠진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상대를 비판하던 정치인들도 결국 자기편에는 감싸기 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 정치의 본질이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거나 공정/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 주변인들의 이익, 그리고 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 정부로 인한 실망의 크기가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기대를 높였다면, 지금은 그때의 기대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 역사는 극복되고 발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반복된다는 사실을 2020년 한국의 정치는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3. '문빠' 그리고 그들만의 계몽 


'문빠'라는 표현이 있다. 보통 '-빠'라고 하면, 마치 눈먼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대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문빠'라는 말은 소위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로 대변되는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이들은 보통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향수,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을 보수언론이나 정당, 그리고 검찰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들의 믿음이 너무 강력하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문재인 대통령, 그리고 더불어 민주당의 이념이나 정책에 맞지 않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비난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맹목적 지지자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의 지지세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태극기 부대', '일베', '친일파' 등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찍는다. 이런 낙인이 찍힌 자들은 속칭 문빠들에게 '동일성의 논리'에 의해서, 자신들의 지지세력의 정당화를 위해 '제거'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들은 마치 '제물의 표식'이 찍힌 자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사도들 같다. 이번에 그들만의 '강마의 의식'에 희생된 것이 바로 추미애 아들에 대한 특혜 의혹을 폭로한 현 모씨이다. 더불어 민주당의 국회의원인 황 모씨 (고드 핸드?)가 지지층이 결집할 수 있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현 모씨의 실명을 공개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현 모씨에게 인신공격을 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건 바로 이 댓글이었다

'이런게 바로 노무현 정신이죠!': 나는 이 댓글이 이른바 '문빠'라고 불리는 맹목적 지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무현과 문재인을 동일시하고 자신의 반대세력은 자한당, 태극기 부대, 부패한 보수세력, 일베 등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문재인과 노무현은 같지 않으며, 문재인과 민주당에 비판을 가한다고 해서 보수도, 일베도, 태극기 부대도 아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숲에 있는 나무들이 햇빛을 받으려고 경쟁하면서 더 높이 자라나듯' 비판과 견제는 정의로운 국가를 위한 핵심 요소이다. 맹목적 지지자들의 동일시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전체주의 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지몽매한 보수 세력과 다르게 '깨어있는 시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착각이 바로 계몽의 신화로부터 탈주술화 Entzauberung 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반인의 실명을 공개해서 댓글 테러를 하는 방식은 '적폐 세력을 숙청하지 않으면 다시 적폐에 찌든 시대가 온다'라는 두려움을 이용하여 그 두려움의 대상인 자신들의 반대 세력을 객체화하고 지배하려는 계몽의 프로세스를 보는 듯하다. 


2020년. 적어도 내가 보는 한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기회도, 공정한 과정도, 그리고 정의로운 결과도 없다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지만... 결국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의 보편성을 갖기에).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제는 공익을 위해 제보를 하면 국회의원이 실명을 공개해서 지지세력에게 댓글 테러의 좌표를 찍어주고, 성추행의 피해자가 '피해 호소인'이라는 신조어를 들어야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여당이 정의롭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야당에 표를 주기도 힘들다. 미래가 암울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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