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은 기숙사에 살던 유학생의 애환
내가 석사과정, 그러니까 이전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4년 반 동안 살았던 집은 대학에서 관리하는 기숙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리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대학 소속의 방치된 기숙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장점은 대학교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점이고, 단점은... 많았다. 일단 건물이 매우 오래되었다. 지어진지 100 년이 넘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처음에 '여기에 사람이 산다고?'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사 온 첫날, 옆 방에 있는 친구가 세탁기가 있는 지하실을 보여주었다. 만약 나와 그 친구가 그 장면을 유튜브 라이브로 보여줬다면 사람들은 흉가 체험을 하는 방송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지하실에 노숙자가 와서 밤에 잠을 자고 가더라). 그러나 집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돈도 없었으므로 이 집이 나에게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크기는 14 크바, 평 수로는 4평이 조금 넘는 크기에 공용 부엌과 공용 화장실이 있었고, 옥탑 방의 두 명과 2층에 사는 (나를 포함해서) 4명, 총 6명이 공용 부엌과 화장실을 썼다.
대학 기숙사의 장점은 기숙사비에 인터넷과 물, 전기세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독일의 물과 전기세는 매우 비싸서 기숙사가 아니라 일반 집에 살면 매우 아껴서 사용해야 한다. 겨울에 춥다고 라디에이터를 많이 키고 있다간 나중에 요금 폭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독일은 아직도 많은 곳에서 라디에이터로 난방을 한다). 처음 2년은 그래도 살 만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이사 왔던 인도에서 온 프리야, 잔소리가 심하긴 했지만 그만큼 우리 부엌과 화장실을 깨끗하게 만들어준 우즈벡에서 온 자리나, 힘들 때마다 방에서 차를 타주며 내 얘길 들어주던 파키스탄에서 온 카스미, 그리고 매일 파스타를 해 먹던 이태리에서 온 쥐세페, 하루 종일 밖에서 조깅을 하는 체코에서 온 얀 까지, 이때까지만 해도 서로 배려하며 즐겁게 지냈던 것 같다. 다 같이 동네에 있는 성에 놀러 가기도 했었다.
우리 기숙사에 있던 친구들은 보통 석사과정이라 2년 후에 다른 도시로 가거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이전 글에서 서술했듯이 4년 반을 석사과정에 있었기에 남아서 새로운 최악의 세대와 마주하게 된다. 덕분에 당시 네이버 웹툰에서 유행하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작품을 정말 공감하며 봤었다.
내방 바로 아래에 이사 온 이름도 모르는 독일 친구가 있었는데, 정말 끔찍한 연주 실력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100년 된 집이라 옆 방 사람 코 고는 소리도 들리는데 바이올린 소리는 오죽하겠나. 그럴 때면 나도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응수했다. 덕분에 내 기타 실력은 많이 늘었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은 절대 조화로운 화음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백아와 종자기가 아니라, "쿵후 허슬"에 나오는 암살자처럼 음악으로 싸웠다. 더 곤혹스러웠던 점은 그녀의 가장 사적이어야 할 소리가 너무나 잘 들린다는 점이었다. 섹스를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남들 다 자는 시간에, 그것도 방음이 안 되는 곳에서 다 같이 살면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이 친구는 매번 소리를 질렀다. 바이올린이야 "밤에는 좀 자제해 주면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섹스는 "아침에만 하면 안 돼?"라든가 "신음 좀 작게 내주면 안 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 난감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그녀의 남자 친구가 빠르게 현자가 된다는 점이었다.
우리 층에 살던 코소보에서 온 친구는 쓰레기를 안 버렸다. 각 층마다 공동으로 쓰는 쓰레기통이 있고 1주일마다 번갈아가며 그 쓰레기를 비워야 하는데 그 녀석은 매일 밤 방에 있으면서도 쓰레기를 절대 비우지 않았다. 3 주가 넘게 쓰레기를 안 비우니 벌레가 들끓었다. 심지어 쓰레기를 버리는 분리수거장은 계단을 내려가서 현관에서 겨우 30초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화가 나서 이야기해보아도 무시하기 일수였다. 거기다 담배는 어찌 그리 많이도 피우는지, 오래된 나무 문 사이로 담배냄새가 항상 들어왔다. 화가 나는 걸 넘어서 진짜 뒤통수라도 한 대 치고 싶었다.
한 번은 도서관을 다녀왔는데 방에 물이 고여있었다. 천장을 보니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 천장 위에는 위층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 물이 내 방으로 새고 있던 것이다. 관리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다음 날 와서 위층의 수도를 잠갔다. 내 방의 천장을 고친 건 누수가 있고 2개월이 지난 뒤였다. 조치라고는 페인트로 천장을 덧칠하는 게 다였다. 내 방은 양반이었다. 공용으로 쓰던 부엌의 천장이 무너져 내린 적도 있었으니까. 새벽에 비가 많이 내린 날이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기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지인의 집에 놀러 가기로 했어서 일찍 나가야 했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다가 본 부엌이 뭔가 이상했다. 부엌의 천장이 뚫려있었다.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은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조치를 취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나는 바로 나가서 기차를 타야 했었고,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사는 기숙사니까 '누구라도 조치를 취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온 기숙사는 변한 게 없었다.
부엌 천장이 무너지면 보통 먼저 관리인에게 전화를 하지 않나? 그런데 우리 층의 아이들은 다른 선택을 했다. 바로 1층 부엌에 가서 밥을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하겠지'가 불러온 참극이었다. 당시 기숙사의 구성원들에게는 '공동체 의식'이란 게 없었다. 공동의 물건을 개인의 것처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엌이 무너지고 나니 '내 부엌'이 '네 부엌'이 되어버렸다.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었다.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이런 것일까? 우리 기숙사는 사회 계약 이전의 원시상태로 돌아갔다.
원시상태가 되자, 인간이 사는 곳에 동물들이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부엌이 항상 지저분했기 때문에 처음엔 다른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누군가가 계속해서 밀가루를 이곳저곳에 뿌려놨다. 너무 화가 나서 청소 좀 하라고 부엌에 쪽지를 써놨다. 그런데 내 말을 못 알아 들었는지 치워도 치워도 계속 밀가루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범인을 알고 나니 왜 내 말이 안 통했는지 알 수 있었다. 범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쥐였다. 그것도 생쥐가 아니라 커다란 들쥐가 우리 부엌에서 식사를 했던 것이다. 독일의 밀가루를 먹어서 그런지 쥐는 너무나 컸고 또 매우 빨랐다. 관리인은 쥐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3일이 지나서야 지하실에 쥐덫을 설치했다. 혼돈의 기숙사를 보며, 당시 나는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패러디한 시를 썼었다:
<밀가루도 세상을 뜨는구나>
또 한 번 널브러진 저 부엌을 본다.
뜯어진 틈으로 탈출한 저 밀가루들이
자기들끼리 끼룩대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부엌에서 떼어 메고
이 부엌 내 식기들 위로 널브러져 있다.
나도 나만이
낄낄대면서
깔쭉 대면서
나만의 부엌을 갖고 싶어 하는데
집값을 보는 순간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사를 가기엔 다른 집들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나의 불편한 동거는 석사 과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덕분에 나는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지금 나는 5평짜리 방에 살고 있다. 다행인 것은, 이 방에는 작은 부엌과 화장실이 있어서 이전에 살던 기숙사처럼 "공멸(共滅)의 고통"을 겪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타인이 왜 지옥인지 뼈저리게 배웠던 만큼, 한국에 돌아가지 않는 한 다시는 공동으로 사는 집에 들어가지는 않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