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바보 Nov 04. 2022

온통 샷시문

여기 슈퍼 아니에요?

우리 집

 신틀바우에서의 짧은 생활을 마치고 이사를 하게 된 집이다. 전세를 얻어 살게 된 집인데 외관이 누가 봐도 슈퍼처럼 생겼다. 이사하고 며칠 동안은 물건을 사러 온 손님들이 왔었는데 그중 슈퍼처럼 생겨서 왜 물건을 안 파냐고 성내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살기 전에도 일반 가정집이었는데 말이다.


집의 구조

 주택, 상가, 어린이집, 성당 등 한 길에 쭈욱 늘어져 있는 곳이다. 이 길의 중간지점에 적갈색 벽돌로 간판 없는 동네슈퍼처럼 만들어진 곳이 이번 우리의 집이다. 입구에는 디딤돌이 있고 앞면은 온통 샷시문으로 되어 있다. 문 위에는 왠지 간판을 걸어야 할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들어가면 신발장과 복도가 있고 복도를 따라가면 부엌이 나온다. 다시 신발장으로 돌아와 앞을 보면 정강이 높이의 단차와 방으로 가는 미닫이 문이 있다. 문을 열고 보이는 첫 번째 방은 안 방이다. 안 방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서랍과 TV, 장식장 등이 있고 오른쪽에는 침구류들이 있다. 안 방에 있는 문을 열면 바로 다음 방이다. 나와 동생이 사용했던 방인데 왼쪽에는 컴퓨터 오른쪽에는 TV와 침구류 그리고 부엌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또 다른 문을 열면 책장과 장롱 등이 있는 창고 같은 방이 나온다. 화장실은 부엌 바로 옆에 붙어있다.


집과 얽힌 이야기

 이사를 하고 전월세 개념을 모르던 어린 내가 전세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노후화된 보일러가 고장 난 일이었는데 집주인은 멀리 산다며 직접 오지 않고 알아서 하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집주인은 우리가 먼저 수리비를 결제하고 자신에게 수리비를 청구하면 수리비를 준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보일러 수리비가 아빠의 월급을 웃도는 금액이어서 우리가 먼저 결제할 여력이 안된다고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집주인은 자기의 일 아니라며 시간만 끌었다. 월세였다면 월세를 안 내며 반항을 하거나 이사를 가면 됐겠지만 전세금이 잡혀있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집주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지인들을 통해 수리비를 마련한 뒤 보일러를 수리했다. 이 과정만 몇 달이 걸렸는데 수리비를 청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수리비 청구 서류를 우편으로 보냈더니 약속과는 다르게 우리가 고장 낸 거 아니냐는 둥 트집을 잡았고 전세는 집주인이 고쳐주는 게 아니라며, 사는 사람들이 고쳐 쓰라며 억지를 부렸다. 우리가 고장 낸 것이면 그렇겠지만 노후화되어 고장 나 있는 것을 우리가 고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적반하장의 집주인은 점차 연락을 피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힘들어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일련의 사건이 있는 동안에도 엄마의 뱃속에는 막둥이가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어느새 엄마의 배는 남산만 해져 걷는 것도 힘들어했다. 집에 있을 때면 엄마의 골반을 두드리고 팔다리를 마사지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배에 손을 얹으면 막둥이가 발로 차는 게 느껴졌고 배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엄마와 아빠는 안 계셨고 친할머니가 와 계셨다. 그날 저녁이었나 며칠 지난 후 저녁 막둥이와 함께 엄마가 집에 왔다. 막둥이를 바라보니 신기했다. 웃기게 생겼다며 놀렸는데 엄마가 우리도 그렇게 생겼었다며 처음 태어났을 때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우리는 다섯 가족이 되었고 외삼촌은 다섯 명이라는 이유로 우리 가족을 독수리 오형제라고 불렀다.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친구가 우리 어렸을 때 처음 본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며 해준 이야기가 있다. 친구의 이야기 덕분에 생생하게 떠올랐는데 홍시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감을 따다 주려고 한 이야기다. 엄마는 감 중에서도 특히 뾰도리감을 좋아했는데 때마침 초등학교 등하교 중에 뾰도리감나무를 발견했다. 감나무에 열린 감이 홍시가 되도록 기다리며 매일 같은 길을 지나다녔다. 그러다 홍시가 되던 날 하굣길에 동생과 만나 함께 홍시를 따러 갔다. 하지만 홍시는 너무 높이 있었고 키가 작았던 동생과 나는 아무리 목마를 태우고 손을 뻗어 보아도 닿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던 친구는 우리에게 다가와 뭐 하고 있는지 물었고 우리는 엄마에게 선물할 홍시를 따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는 이 말을 듣고 참 신기했다고 한다. 이 친구는 그때 당시를 떠올리며 자신도 어렸지만 어린 우리가 엄마를 위해 행동하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져 우리를 도와줬다고 한다. 친구의 도움으로 우리는 손쉽게 홍시를 딸 수 있었고 우리는 기쁜 마음에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해 엄마에게 홍시를 주며 홍시를 따던 일을 이야기하니 엄마는 친구에게 돌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돌아간 그 자리에 친구는 이미 없었고 이름도 반도 몰라 찾을 수 없어 서서히 잊혀 갔다. 이 이야기를 해주던 친구는 그때 내심 서운했다며 도와줬는데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갈 수 있냐고 그때는 좀 그랬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에 나는 친구에게 그 사람이 너였냐며 뒤늦은 감사인사를 전했다.


 막둥이가 우리 집으로 온 뒤 참 많은 게 바뀌었다. 육아가 시작된 것이다. 막둥이를 대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며 거의 모든 것을 따라 했다. 모유 수유하는 엄마를 따라 하기도 하고 배 위에 막둥이를 올려놓고 재우던 아빠를 따라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는 분유를 타 먹이고 소화도 시키고 기저귀도 갈아주며 부모님이 막둥이를 나에게 맡기고 잠시 외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육아의 대부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막둥이에게 미안한 일이 있다. 여름날 집에서 막둥이를 하늘 높이 던지며 놀다가 그만 대나무 돗자리 위에 떨어뜨린 것이다. 막둥이는 하염없이 울었고 이마에는 대나무 돗자리의 자국이 빨갛게 남아있었다. 다행히도 화려한 육아 스킬로 울음은 금방 잠잠해졌고 이마의 자국도 금방 사라졌다. 이 날 티는 못 냈지만 정말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조금 울었다.


 이 집으로 이사 한 뒤 참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왔다. 막둥이가 생긴 초반에는 친할머니도 종종 오셨고 이후에는 아빠 친구들과 친척 형, 누나도 자주 놀러 왔다. 형은 여자 친구랑도 자주 왔는데 형 여자 친구가 막둥이를 좋아해서 이별 후에도 종종 놀러 왔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누군가 놀러 오면 술을 자주 마셨는데 그 모습을 보며 엄마 아빠에게 술이 맛있냐고 물었다. 내 물음에 엄마 아빠는 맥주를 조금 주었고 나는 거품만 살짝 맛보다가 엄마 아빠가 마시는 모습을 따라 원 샷을 했다. 즐거운 분위기에 두 번은 더 마셨고 방으로 돌아가 동생에게 술을 마셨다고 취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리고 나 혼자만 알고 있는 흑역사를 하나 만든 뒤 잠들었다.


슈퍼 같았던 집과의 이별

 이 집에는 4년 정도 살면서 다양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동네 친구들을 만들어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며 다니기도 했고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기도 했다. 동생과 함께 시리얼을 먹으며 만화를 보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합기도도 다녔지만 점점 싸우는 일도 많아지고 각자의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며 조금씩 멀어지기도 했다. 이 글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지만 쓰지 못한 많은 시간들과 마주하다 보니 그리움과 후회가 공존한다.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움은 돌아오지 않는 지나간 시간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것이라 더 애타고 아프다는 것을.






작가의 이전글 갈색 양철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