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객석 1층에 홀로 XY 염색체로 존재하는 경험에 대하여
세 번, 아니 네 번이었던가. 객석 1층에 홀로 자리했던 적이?
막이 오르기 직전, 첫 번째 암전이 객석을 뒤덮기 전에 한 번쯤 주위를 둘러본다. 객석의 분위기, 공기의 무게, 함께 공연을 관람할 관객들의 성향에 따라 오늘의 무대가 달라진다. 공연이 순간의 예술이라는 건,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뿐 아니라 무대, 음향, 조명, 그리고 관객이 함께 그날의 공연을 만들어간다는 의미일 터. '회전문'이라 불리는,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다시 보는 공연문화가 등장한 것 역시 관객들에게 오늘의 공연과 내일의 공연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공연장을 둘러보다가 잠깐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으니, 내가 앉아있는 객석 1층에 남자 관객이 나밖에 없을 때다. 분명, 그것은 운이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2017년 기준으로 인터파크 전체 공연 예매자의 비율은 여성이 71%, 남성이 29%다. 수치가 단순히 '예매자'의 ID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해도 어쨌든 7:3의 비율이니, 객석에 나 혼자 XY 염색체를 가진 생명체일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 번의 경험들을 선사한 공연은 모두 이른바 '덕극'이었고, 그것이 변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위에서 말했던 경험 중 두 번은 같은 극에서 발생했으니, 그것은 나의 최애 뮤지컬 중 하나인 '쓰릴 미'였다. 남자 2인극에, 피아노 한 대의 반주로 진행되는 심리스릴러극. 1924년에 시카고에서 있었던 14세 소년 유괴살인사건을 주제로 한 뮤지컬로, 연뮤덕(연극, 뮤지컬 덕후)들이 말하는 이른바 '머글'이 관람한다면 다소 당황할 지도 모르는 그런 극 말이다.
특정 극들을 특정 계층이 많이 관람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극들은 특정 성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아, 기획부터 특정 성별을 위해 구성된 일부 공연들은 제외하고). 공연에 더 가까운 나이, 성별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존재할지언정, 특정 극들이 특정 계층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는 시각은 다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이 상업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연극과 뮤지컬에 대한 편한 글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극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고 소개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한 사람들이 공연예술에 대한 벽을 허물고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객석에 홀로 남자로 존재하는 경험은 일상적이지 않지만, 공연장에 남자 관객이 드문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십여 년 동안 뮤지컬과 연극 공연장을 맴돌면서 여자화장실 줄보다 남자화장실 줄이 더 긴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인터미션에 산책하듯이 휘적휘적 화장실로 향해도, 아주 작은 소극장이 아닌 경우에야 일을 보기 위해 남자화장실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것은 화장실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실제 관객의 비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줄을 서지 않고 화장실에 입장하는 경험은 어쩌면, 가끔은 해피엔딩일 수도 있겠으나 때로는 다소 외롭고 씁쓸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를 뮤지컬 덕후로 분류하는 남자사람은 더욱 없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회적인 편견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영미권의 경우 뮤지컬을 좋아하는(혹은 하는) 남자가 게이로 상징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극이나 뮤지컬에는 동성애를 주제로 한 극들이 적지 않고, 뮤지컬〈킹키부츠〉의 '롤라'와 같은 동성애 캐릭터나 〈라카지〉, 〈프리실라〉와 같이 드래그 퀸(Drag queen, 여장남자)들을 소재로 한 극들이 화려한 의상과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것이 어떠한 성적 지향성을 드러내는 스테레오타입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성의식의 발로다. 다행히 국내에서는 그런 인식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지만.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것은,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N사의 지식백과는 '덕후'라는 단어가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고 일컫고 있다. 덕의 정의가 공연을 많이 보는 사람인지, 공연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지, 혹은 공연관계자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스스로를 당당한 대한민국의 뮤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뮤지컬, 그리고 연극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써보려고 한다.
연극, 뮤지컬 관람이 남자 관객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데이트코스 중 하나가 아니라 취미의 한 분야로 더 굳건히 자리잡기를 바란다. 공연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공연을 접하고 사랑함으로써 이 시장이 영속하기를바란다(그래야 더 좋은 극들이 더 많이 올라올 테니까). 굳이 남덕이라는 타이틀을 쓰는 것은 젠더적인 의미나, 향후 주제에 대한 방향성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남덕'을 표방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그 시각을 담아내는 글이나 콘텐츠 역시 적은 만큼 조금은 신선하고 참신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해서다.
앞으로 발행할 모든 글들은 '레이디스 앤 젠틀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직 결정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