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현 Dec 03. 2018

숨 막히는 눈치싸움, '피켓팅'을 아십니까?

같은 값인데 왜 내 자리는 여기고, 쟤 자리는 저기인 거죠?

야, 망했다. 완전 눈밭이야.


"들어가는 순간 이미 이선좌 세 번 맞고 포도알 몇 개 보지도 못했다, 야. 미쳤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면, 당신은 이미 공연문화에 익숙한 사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다. 간단히 해석하면, 공연/콘서트 등을 보기 위해 티켓 오픈 시간에 맞추어 티켓팅을 했는데, 내가 선택하는 자리마다 '택한 석입니다'라는 팝업이 뜨며 세 번을 퇴짜 맞고, 남은 자리는 거의 보지도 못한 채 티켓팅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요약하면, 티켓팅 망했다는 뜻.


제7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를 맞아 제작한 '알.편.뮤.어(알아두면 편리한 뮤지컬 용어사전)'. 근데, 예그린어워드 볼 정도 사람들은 이미 다 알아ㅇ... (출처: 예그린뮤지컬어워드)


'피켓팅'이라는 공연 은어가 있다. '피가 튀는 전쟁터 같은 티켓팅'이라는 뜻으로, 좋은 공연이나 유명한 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공연의 티켓팅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들 사이에서는 티켓팅에 '참전(參戰)'한다는 말이 일반화되었으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연의 티켓, 그것도 좋은 자리를 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알만하다.


내 인생 최고의 피켓팅은 2016년 3월의 뮤지컬〈빨래〉였다. 〈빨래〉는 대학로에서 거의 오픈런으로 돌고 있는 공연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2016년 3월의 〈빨래〉는 좀 많이, 특별했다. 바로 홍광호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국 배우 최초로 웨스트앤드에 진출해 뮤지컬 〈미스사이공〉에서 당당히 투이 역을 거머쥔 배우.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뮤지컬배우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단단한 목소리와 울림을 가진 매력적인 배우 홍광호. 그가 2009년 이후 최초로 소극장 무대로 내려오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단 말이다. 그것도 단, 오직 12회 차만.

대극장 무대도 가볍게 채워버리는 발성과 성량의 소유자인 그가 소극장에 온다니. 굳이 마이크를 찰 필요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기사는 오보다. 3분이 아니라, 정말로 3초만에 매진되었다. (출처: 이뉴스투데이)


그날은 아침부터 깨끗이 몸을 씻고 흰 옷을 입고 몸을 정갈하게 했다. 결전의 날이었다. 티켓팅은 오후 세시. 한시 반에 수업이 있었고, 수업은 두시 사십오 분에 끝난다. 우리 학교는 대학로와 가까운 곳이었는데, 공연을 대학로에서 하니 공연장과 가까운 학교 전산실에서 티켓팅을 하면 왠지 서버 속도가 다른 곳보다 빠를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하며 전산실을 예약했다. 수업은 티켓팅 15분 전에 끝나니 시간은 충분한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져서 가방을 두고 2시 30분에 강의실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계단을 통해 전산실이 있는 2층으로 내려가는데 왠지 모르게 손에 땀이 찼다. 자리에 앉아 로그인을 하고, 인터파크에 접속했다. 빨랐다. 역시 대학로랑 가까우니까 빠른 건가? 내가 그래도 3년간의 수강신청으로 단련된 몸인데, 할 수 있을 거야. 그 빡세다는 경영학과 수업을 모조리 올클(All Clear)하던 내가 아니던가.


한쪽 귀퉁이에는 네이비즘 서버시간을 띄워놓고 인터파크티켓 주소를 입력했다. 다른 한쪽에는 티켓팅 창이 떠 있었다. 이제 됐다. 시뮬레이션 한대로만 하면 돼. 14시 59분 59초가 되면, 달력을 넘기고, 3월 17일을 누르고 저녁 8시 회차를 선택하고 아무 데나 보이는 자리를 눌러서 다음으로 넘기면 돼, 침착하자. 시간은 이윽고 59분에 접어들었고, 그때부터 흐르는 1초 1초가 영겁같이 느껴졌다. 50초대로 접어들면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도 손과 함께 떨렸다. 이러다가 혈압이 올라서 터지는 건 아닐까. 그리고, 59초. 클릭, 클릭, 클릭!


홍광호 배우의 솔롱고를 보는 느낌은 흡사 K리그 경기를 뛰는 메시를 보는 기분이었다. (출처: terikero)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성공했던 피켓팅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이 정도로 성공한 티켓팅을 해보지 못했다. 나는 셋째 줄인 C열 중앙 좌석 예매에 성공했는데, 12회밖에 없었던 홍광호 배우 회차의 티켓은 A, B, C열의 경우에 암표 가격이 무려 30만 원 대로 형성되었다(본래 티켓 가격은 할인 없이 5만 원이었다).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중고나라에 올라온 티켓 가격에 잠시 동공이 (몹시) 흔들렸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영광스러운 이 공연을 결론적으로는 나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그리고, 후회는 없었다.


홍광호 배우의 성대는 소극장에서 더욱 빛났다. 아마도 마이크 음량은 매우 낮게 세팅되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참 예뻐요' 넘버에서는 저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리는 소리인지, 그냥 홍광호 배우 목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영 역을 맡은 홍지희 배우와의 케미도 좋았고, 몽골 이주노동자 느낌도 약간 있어 솔롱고 역에 잘 어울렸다. 영국에서 〈미스사이공〉공연을 하면서 (그곳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외로움과 설움을 느끼고 와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에서 더 슬퍼 보였다. 그만큼 좋았고, 그만큼 완벽했다. 피켓팅을 뚫고 자리를 쟁취한 보람이 있었다.




티켓팅을 잘하는 방법에 대한 글들은 많다. 나도 그런 글들을 많이 읽고 나름의 방식으로 티켓팅을 하고 있지만, 티켓팅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티켓팅을 잘 못하니까. 이상하게 59초에 들어가면 이미 포도알들이 사라져 있고, 58초에 들어가면 아직 좌석이 열리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 앞자리를 클릭하면 앞자리대로 이선좌(이미 선택한 좌석입니다)고, 뒷자리를 선택하면 뒷자리대로 이선좌다. 가끔 운이 좋을 때만 좋은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제는 적당한 자리에서 봐도 그러려니 한다. 정말로 좋은 자리를 잡고 싶을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한다. 너무 보고 싶은 공연은 다섯 명, 여섯 명에게 부탁을 하고 동시에 같은 시간대에 참전한다. 어쨌든 머릿수가 늘어나니까, 좋은 자리를 잡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그렇게 가장 많이 성공했다.


전하, 인터파크에는 아직 12개의 좌석이 남아있나이다. (출처: sanobee)

'자리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공연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한다. 더 좋은 자리, 덜 좋은 자리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공연이 더 좋아지거나 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앉은자리에서만 보이는 장면도 있을 것이고, 자리에 따라 극의 의미가, 연기의 해석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만일 어떤 공연을 여러 번 보게 된다면 좋은 자리를 찾아 앞자리, 중앙 자리만 찾을 것이 아니라 왼쪽 블록, 오른쪽 블록, 앞자리, 뒷자리를 바꾸어 가며 보기를 권장한다. 전체 무대를 볼 때, 배우와 가까이 있을 때, 오른쪽 무대를 볼 때, 왼쪽 무대를 볼 때에 따라 공연은 여러분에게 다른 맛과 재미를 선사해줄 것이다.


실제로 앞자리가 무작정 좋은 것은 아니다. 뮤지컬 〈로기수〉를 볼 때는 맨 앞자리를 잡아서 기대감에 가득 차 극장에 들어갔는데, 공연 내내 탭댄스를 추는 바람에 1열에서 배우들의 발사위에 맞춰 풀풀 날리는 먼지와 흙냄새를 맡아야 했다. 뮤지컬 〈1446〉의 경우에는 초대권으로 관람을 가서 2층 뒷자리를 받아 아쉬운 마음으로 관람을 시작했는데, 무대 전체에 장황하게 펼쳐지는 검술 퍼포먼스와 아크로바틱, 그리고 화려한 의상과 무대에 오히려 '멀리서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좌석도 물론 좋은 게 좋지만, 결국 극에 따라 좋은 자리가 다르고, 또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켓팅은 단순히 연극/뮤지컬에만 통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명절 때가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예매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가락 전쟁이 시작되기도 하고, 연말이 다가오니 크리스마스나 연말 콘서트 좌석을 잡기 위한 암투가 계속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거의 모든 기회를 잡는 작업은 피켓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눈치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이 땅의 덕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걱정 말아요, 무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