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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Oct 04. 2023

결국 할 일은 요양보호사야?

추석연휴를 앞둔 어느 날, 오랜만에 세자매가 모여 점심을 함께했다.

4살아래 여동생은 싱글이고 골프라는 취미가 나와 맞아 비교적 자주 왕래를 하며 살고있는데, 2살 위 언니는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다가 집에서 꼭 저녁을 드시는 형부 그리고 고2, 중2 장성한 두 아들이 있어 집안행사외에 따로 만나기가 수월찮다.


"나 요양보호사 자격증이나 딸까봐..?"

동네 샤브샤브집에 앉아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 언니의 말이다.

"갑자기?"

  


언니는 25년차 치위생사다.

지금 근무하는 치과에서는 무려 11년째 근무중이다.

언니는 첫아이를 출산하고 3개월째 되던 날부터 아이를 가정보육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치과로 출근했다.

다행히 친정부모님과 같은 아파트에 신혼집을 얻어 간간히 육아도움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이어나갔다.

둘째를 낳고도 역시 치과 파트타임근무를 이어가다가 아이가 고학년이 되자 풀타임근무로 바꿔 지금까지 근무중이다.

언니는 우리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인척들에게도 치과주치의 역할을 해왔다.

명절때만 되면 너나 할거 없이 언니의 무릎팍에 누워 입을 쩍쩍 벌리며 그간 느껴온 증상들을 열거하기도 하고, 아이들 젖니를 들이밀며 '이게 맞니, 저게 괜찮니'하며 봐달라고 조른다.

비록 언니에게 치료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이건 충치다 아니다','이건 괜찮다 아니다','그 치료는 비싸다 알맞다.','교정은 지금해라 아니다.'라는 말정도만 들어도 우린 안심을 하기도 하고, 치과를 가리라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치과 내부에서 정한 직원복지차원의 가족할인제도를 이용하여, 부모님의 임플란트비용이나 아이들의 교정비용도 많이 절감할 수있었다.

나 역시도 때때로 주변지인들의 입속 사정에 관한 궁금증을 언니를 통해 해결해 주곤 했으니, 가히 언니덕에치과인프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전문분야 하나없이 '전업주부', '경단녀' 딱지만 달고 있는 나에게는 치위생사로 누구보다 고급전문인력인 언니가 요양보호사로 갑자기 전향을 한다고 하니 "갑자기 왜?"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고, 나 역시 앞으로 실버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나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훗날 본인들의 가족(부모)봉양하는 것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큰 그림을 그리며 그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내 말은, 젖먹이 두 아들에게 억지 공갈젖꼭지까지 물려가며 지켜온 치위생사라는 전문커리어가 왜 인생2막까지 연결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언니의 말인 즉슨, 

치위생사라는 직업의 정년은 그 치과의 전문의가 치과를 폐업하면 끝나는 것인데, 지금 근무하는 곳의 전문의가 어느새 70대 고령임을 감안하면 본인의 정년도 곧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한다는 것. 

이제 47살인 언니는 다른 치과에서 반기는 연령도 아니고, 인생2막 준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요양보호사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노라니, 비슷한 장면의 데자뷰들이 스쳐지나갔다.

공인중개사를 준비하던 동생도, 유아교육과를 나와 어린이집 근무를 하던 고교동창도, 학습지 교사를 하던 동네지인도, 전업주부였던 다수의 OO엄마들도 모두들 하나같이 결국 "요양보호사자격증"을 그들의 인생2막으로 한번쯤은 생각을 했다.

전업주부를 선언하고, 육아에 매진을 해온 엄마들의 경력단절은 나중에 얘기한다 치고.

40대 후반, 그 경력 하나 단절시키지 않고 이어나가 보겠다고 치열하게 십수년을 살아온 그녀들, 직장맘들이 중년이 되어 직장과 아이들의 삶에서 반강제적 퇴출을 당하는 시기가 되었다.

이제와보니 그토록 처절하게 지켜온 그 "경력"은 그녀들의 인생2막까지 보장시켜주진 않는가보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그토록 지켜온 것일까.

 


난 언니의 치과근무 경험과 치아관련 지식들을 풀어놓는 SNS활동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해보았다. 오늘도 블로그엔 젊은 치과의사들이 개업한 치과의 이웃추가 메세지가 날라오고, 인스타그램엔 어린 치위생사들이 릴스에 춤을 추며 강의를 나간다. 

출산휴가로 사용한 6개월의 공백을 제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치곡차곡 채운 25년간의 치과근무 경험이 그들보다 못하진 않아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난 언니가 그녀의 노하우를 적당히 녹여낸 글쓰기로 콘텐츠를 만들어 본인의 커리어를 어디에서든 계속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난 글쓰는 거 잘 못해서..." 머뭇거리는 언니를 향해 한마디 한다.


"글쓰는게 요양보호사 따는 것 보다 훨씬 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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