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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Sep 11. 2023

공황장애를 이긴 글쓰기

한번 쓰고 버리는 일기

아무 이유 없이 자꾸만 초조해졌다.
심장은 간헐적으로 불규칙하게 뛰고, 마치 바늘에 실을 꿰어 가슴을 관통해 등뒤로 빼내어 당기는 것처럼 갑갑해져 숨을 시원하게 쉴 수가 없다.
한의원, 심장조영술, 흉부 CT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나오는 병명이 없다.
대학병원에 3일째 입원하는 날, 내 병실로 오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선생님이 건네준 약봉투 하나를 받아먹었는데, 그날 밤 난 최근 몇 년 만에 가장 달게 잠을 잤다.

그렇게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진단이 떨어지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항불안제와 항우울제.
"내가 정신과약을???" 가장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대체 내가 왜??"였다.
큰 아이가 만 3세, 작은 아이는 이제 11개월. 아직 젖도 못 뗀 상태였다.
육아스트레스? 이 정도 스트레스는 누구나 겪는 것이고, 나도 어느 정도 감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스스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공황장애란 말인가?
어쨌든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으니, 급하게 둘째의 젖을 떼었다. 그리고 가정보육 중이던 큰 딸을 단지 내 어린이집에 입소시켰다.
준비된 상태도 아니고 계획했던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괴감이 덮쳤다.
자괴감 때문인지, 공황장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하는 엄마라는 생각에 우울감이 커졌다.

한동안 가족을 제외한 주변인들과의 교류를 끊었다.
내가 살려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도 나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들을 차단해야만 했다.
이런 나는 가족들에게 짐만 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가지만 부르짖었다.
"아픈 엄마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
그렇게 아이들만 바라보며 수년에 걸쳐 서서히 약의 용량을 줄이고, 단약을 시도해 나갔다.
다행히 경증에 속하는 편이라 큰 어려움 없이 회복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회복되는 기간 동안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왜 하필 나였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 끝에서 내 깊은 본질과 마주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찾아온 공황장애는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시련이었다.


나는 완벽주의자였고, 타인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며, 항상 나를 경쟁 속에 놓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나의 내면은 항상 외로우며, 행복한 순간에도 그 행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 나는 어쩌면 불안함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집 안에 돌아다니는 노트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것이라도 좋았다. 아이들 쓰다만 알림장이든, 동네은행에서 나눠준 가계부용 다이어리든.

펜의 색깔도, 종류도 가리지 않고 잡히는 대로 집어 내가 느끼는 것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두 번도 읽지 않을 다이어리"라고 이름 지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그날의 일들, 혹은 그날 생각한 과거의 일들이나 미래의 일들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쓰기 시작했는데 어떤 날은 하루분량이 3,4페이지를 꽉꽉 채우곤 했다.

한번 쓴 내용은 절대로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읽는 순간 그 글을 썼을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트가 다 채워지면 들춰보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기에 그 당시 어떤 내용들을 썼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부분은 경력이 단절된 채 육아에 매진하며 느꼈던 설움과 울분이었던 것 같다.

"여자의 일생이 어차피 이리 정해진 것이라면, 나는 내 딸들의 꿈은 묻지도 않은 채 지금부터 살림과 육아만을 가르치겠다."

라고 쓴 것만 기억이 나니 말이다.

너무나 대단한 일을 하러 주말에도 출근하는 남편과 남편만큼 벌어오지 못할 거면 애를 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어머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왜 복직을 서두르지 않느냐는 친정부모님의 기대와 요리도 살림도 육아도 동네 여느 엄마들처럼 즐기면서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원망. 이 모든 것들을 섞어서 비틀어 짠 글들이 매일매일 한가득 쏟아졌다.  

쌓여가는 일기장을 버릴 때마다, 그곳엔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져버리는 내 안의 가장 약한 나만 남아있었다.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내면의 나를 대면하고, 평생 그것을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더 이상 불안이 두렵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는 인생의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내고, 보다 소중한 것에 집중하며 사는 것으로 "두 번도 읽지 않을 일기장"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육아에 있어서는 실수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덜 실수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기준으로 잡았다.

양가 부모님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덜 후회하는 선택을 하는 것으로 거리를 두었다. 남편에 대해서는 혼자서도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둘이서도 바로 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조절했다.

어느 순간 나는 내 공황장애가 아주 적절한 시점에 나에게 찾아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숨 막히게 했던 공황장애는 오히려 나를 숨 쉬게 해 주었는데, 이는 "쓴다는 것"을 통해 가능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두 번도 읽지 않고 버리는 글"은 쓰지 않는다. 대신 내 일상 속에 보석 같은 부분을 찾아내는 글을 쓴다. 그리고 나만 여러 번 읽어도 좋고, 누군가가 한 번쯤 읽어주면 감사한 글을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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