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하교하고 돌아오면 그곳에서 간식과 저녁을 먹였다. 제대로 된 주방이 없으니, 편의점 간편식과 카페에서 판매하던 케이크와 음료수로 아이들을 먹였다. 창문하나 달려있지 않은 쪽방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아이들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다 저녁시간을 봐줄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아이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일이 생기면 아이들을 두고 카페로 뛰쳐나가곤 했다.
남편은 여의도 금융회사에 근무했다.
우린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30평대 자가아파트에 살았다. 남들은 나더러 왜 사서 고생이냐고 했다.
정말 고생스러웠다.
카페 일에 집중할 수가 없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아르바이트생이 펑크를 낼 때마다 치미는 분노는, 단 것에 찌든 아이들에게 향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난 그 당시 좀 있던 글재주로 내 책도 발간한 상태여서, 소소한 글들을 써가며 "내 일"을 해나가고 싶었는데, 카페를 운영하면서부터 스크루지처럼 독해지고 싶어진 것이다.
몇 달 가게를 운영해 보니, 집에서 전업주부로 살다 밖으로 내 던져진 나는 가엾게도 온실 속 잡초였다.
흠집이 난 채 배송된 물품에도 싫은 소리 한 번을 못했고, 매장을 방문하는 갖가지 판매원들의 물건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재료를 사고 세금계산서도 떳떳이 발행해 달랠 줄 몰랐고, 손님이 에스프레소 샷추가를 5번 요구해도 추가요금조차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난 조그만 가게 하나 낸 것뿐인데 세상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단 돈 100원, 200원의 마진을 붙여 파는 물건을 영업하기 위해 골목을 뒤지는 치열한 삶들은 호의로 내민 내 손에 팔 물건을 내놓았고, 샘플을 남기고 떠났다. 난 세상이 나에게 마냥 친절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 호장(호구+사장)이었다.
낭만에 절여진 철없는 손으로는 아무것도 써지질 않았고, 나의 단단해진 이성을 뚫고 나올 만큼 내 감성은 다부지질 못해, 난 차라리 내가 빨리 닳고 닳아버리고 싶어졌다.
난 수능성적에 맞춰 갈 수 있는 대학을 가서 하기 싫은 공부를 했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내가 하고 싶던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차린 카페가 내가 태어나서 유일하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현실화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육아와 병행되지도 않았고, 나의 효능감 향상은커녕 나의 자아를 갉아먹은 채 끝이 났다. 셋째를 출산하고, 마냥 실패감에 젖어 있을 수 없었던 나는 “모든 것엔 교훈이 있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나의 효능감을 올려주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나를 잘 파악해야 하는 것. 일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
육아는 아이를 상대로 하는 감정노동이 90% 이상이기 때문에, 단순히 나의 경력연장이나 관련업무능력 향상이 좋은 육아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육아와 "병행"을 넘어서 서로 윈윈 하는 관계가 되는 일.
요즘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있다.
무언가 복받쳐 오르면 쏟아내는 끄적임이 아니라, 이 글쓰기를 일처럼 해보기로 했다. 글쓰기는 내 감성을 다부지게 만들지 않아도 내 자존감을 지켜주고, 나의 효능감도 올려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 일과 육아가 병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