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동갑내기 커플이다. 불같은 성미를 가진 아빠는 엄마와 정말 많이 싸웠다. 지금은 두 분이 너무나 다정하게 잘 지내는 부부지만, 그때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그나마 아빠와는 다르게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고 푸근한 엄마 덕에 나는 맘을 달래며 살 수 있었다.
그날도 아빠와 엄마가 밥을 먹다가 큰 소리를 내며 싸우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은 그저 묵묵히 밥상에 앉아서 그 상황을 견뎌내고 있었다. 보통은 싸우고 난 뒤에 엄마는 우리에게 속상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엄마가 속이 많이 상했었는지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고 누워서 잠이 들어 있었다. 잠에서 깬 엄마는 자식들 그 누구도 와서 이불을 덮어주거나 위로해주지 않았음에 맘이 상했던 듯싶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은 아주 오랫동안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었다.
“넌 애가 정이 없어, 애가 차갑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지만 그 말은 내 마음속 아주 깊이 새겨졌다. 평소엔 포근하고 다정한 엄마이지만 가끔 내게 서운할 때면 아픈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 말에 대꾸도 못 하고 조용히 마음을 찔렸지만,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나 생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가 정이 없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와 싸우고 슬픈 엄마를 위로하고 돕고 싶었지만 생각뿐이지 난 항상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견뎌낼 뿐이었다. 그리고 자책했다. 나는 나쁜 아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아이를 낳아 9년을 키우면서 서서히 바뀌었다. 지금에서야 그 당시의 어린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 아이보다 조금 컸을 어린 나는 큰 소리를 내며 밥상에서 싸우는 부모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때의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가, 열이 뜨겁게 오르던 얼굴이, 저리던 손이 기억난다. 어딘가로 피하고 싶었지만, 움직일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그저 견뎌낼 뿐이었다, 가만히 들리지 않는 척 보이지 않는 척하며 힘을 끌어모아 나를 지켜내고 있었다. 작고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무기력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를 위로할 수 없음이, 엄마를 이 고통에서 구해낼 수 없음이 항상 너무나 아팠다. 나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였다. 엄마의 따뜻함과 지혜로움과 잔잔한 성품을 깊이 사랑했다. 그런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는 그런 내가 참 미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차가운 인간이어서, 정이 없는 인간이어서 그렇다고 자책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의 어린 나를 이해한다.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의 큰 싸움을 보며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 묵묵한 견딤이었음을 알겠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이 아픔과 죄책감을 느끼던 나를 이제야 본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무기력한 내 모습은 항상 나에게 아프고 싫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어린 나를 안아주고 싶다. 품에 따스하게 안고 말해주고 싶다. 얼마나 무서웠니. 엄마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지? 네 마음 알아. 괜찮아. 괜찮아. 넌 차갑고 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야. 엄마를 사랑하는 네 마음 알고 있어. 네 마음 오랜 시간 알아주지 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