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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우 Jun 08. 2021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 세심하고 다정한 충고

  경기도에서 죽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나는 서울로 대학을 다니면서 그야말로 별세계를 만났다. 명동에 처음 갔을 때 높이 솟은 빌딩들을 보고 속으로 우와 하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빌딩을 올려다보는 놀란 내 눈빛을 들킬까 걱정도 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며, 내가 정말 좁은 세상 속에 살았구나 생각했다. 내 가족과 주변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인간관계라는 걸 겪어 본 일이 없는 나에게 대학에 가며 만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별세계 사람들 같았다. 그중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두 번의 만남이 있다.

 

   대학교 1학년, 어느 동아리에 들어갈까 하며 동아리 방이 있는 건물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서성이다 책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서서 간식을 먹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힐끗 쳐다보자 들어와서 먹고 가라며 넉살 좋게 부르는 선배들의 부름에 쭈뼛쭈뼛 들어갔다. 그리고 단번에 그 동아리에 가입했다. 키가 크고 배우 뺨치게 생긴 선배가 간식을 먹고 있었던 것이 동아리 선택에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 동아리는 연극 동아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무대에 동경이 있었던 나는 연극 동아리 생활이 정말 즐거웠다. 연극을 하기 위해 모인 다양한 전공의 선배, 동기들은 다들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연극 대본을 읽고, 공연을 올리기 위해 연습하는 시간이 넘치게 즐거웠다.


  그러다 3학년의 카리스마 넘치는 선배 언니의 연출로 동아리의 정기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1인 4역을 맡게 되었다. 주요 배역은 아니었지만, 감초처럼 장면마다 등장하는 역할이었다. 처음 제대로 큰 무대에 서게 되려니 긴장도 되었지만 정말 신났었다. 그런데 몇 마디  안 되는 대사에도 연습을 시작하기만 하면 연출님은 뭔가 못마땅해 했다. 내가 서 있는 모습이 어색하다는 것이었다. 서 있는 게 어색하다니??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사 톤이 어색하다거나, 몸동작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서 있는 것이 어색하다고 하니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고, 마음속에서 소심한 분노도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좋아하던 동아리 생활이었는데 자꾸 혼이 나고 지적을 당하니 즐거움도 흥미도 떨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한 학번 위의 선배가 물끄러미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말했다. “음... 네가 배를 내밀고 서 있네.” 그냥 가볍게 툭 던진 말이었는데, 나한테는 답답하던 문제의 물꼬를 탁 틔워준 말이 되었다. 아, 내가 몸의 중심이 뒤로 쏠려있구나. 그래서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고 뒤로 넘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구나! 아랫배를 넣고 엉덩이는 앞으로 내밀어서 척추를 곧게 세운다. 어떻게 똑바로 서야 하는지 선배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연습을 해서, 연출 앞에 섰다. “이제 좀 괜찮네.”라는 연출님의 말이 정말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순조롭게 준비해서 생애 처음으로 큰 무대에서 즐길 수 있었다. 다정히 나를 지켜보고 조심히 말 건네준 선배의 한 마디 덕이었다.


  두 번째 잊지 못할 만남은 우연한 기회에 뮤지컬 방송국의 리포터로 일하게 되어 활동을 막 시작하려던 시기의 일이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학생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다 같이 모여 회의를 하고 회식을 한다고 호프집에 갔다. 맛있는 안주를 시키고 술잔을 받아들고 앉아있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기에 조용히 안주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밖에서 먹는 새로운 음식 모든 것이 다 맛있었던 때라 정말 열심히 먹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날 처음 만난 여자분이 나에게 말했다. “같이 술 마실 때, 천천히 먹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지!” 얼굴이 붉어지고 너무나 민망했다. 다정하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면박을 주는 듯한 말투여서 더 부끄러웠다.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창피한 마음을 숨기고 천천히 먹는 속도를 조절하며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 두 가지 만남 이후로 분명 나는 변했다. 배를 내밀지 않고 똑바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고, 술자리에서 안주에만 집중하지 않고 속도를 맞추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다정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네가 배를 내밀고 서 있네”라고 조용히 알려주던 선배처럼 처음인 사람에게 조금만 더 친절히 다정하게 알려준다면 참 좋겠다. 연출을 하던 선배나 처음 만난 여자분도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지만 그 과정이 꽤 아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서있는 자세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준 선배의 한마디였다.


  나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해준다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생각으로 툭 던지는 말이 가닿는 사람의 마음에는 아픔이 되지는 않았을는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좀 더 세심하게 다정하게 상대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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