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우 Jul 22. 2021

홀로 떠난 파리


2008년 여름, 입사 3년 차에 접어든 나는 다가오는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설레는 맘에 발이 땅에서 10센티쯤 떠 있었다. 가족들과의 국내 여행과 대학교 때 단체로 갔던 일본 여행, 입사 첫해에 회사 동료와 떠났던 태국 패키지여행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스스로 계획해서 떠나는 자유 여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 유럽 여행이었다! 무려 유럽을, 자유 여행으로 가다니! 내가 너무 멋있었다.


같이 가는 일행은 아카펠라 동호회에서 만나 여성 아카펠라 팀을 함께 하는 언니였다. 팀 활동을 하면서 의견 충돌이 잦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고 여름 휴가 일정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귀했기 때문에 함께 여행을 가기로 의기투합했다.


예전부터 유럽 여행이라면 스페인에 꼭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의 밝은 태양 아래 보랏빛으로 파란 하늘을 가득 수놓은 자카란다꽃 사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흠뻑 반했었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구엘 공원의 사진을 보면서 저 놀라운 조각과 건축물을 꼭 실물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는 꼭 ‘파리’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행 시작부터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언니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뭐 파리도 좋았다. 유럽 하면 또 프랑스 아닌가.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는 파리 여행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의욕이 만만한 채로 7박 9일 일정의 에어텔을 먼저 예약했다. 처음 멀리 떠나는 여행이어서 숙소는 좀 좋은 곳으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항공과 호텔 패키지로 예약을 했다.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한 언니는 왜인지 좀 심드렁하고 바쁘다고 해서 내가 주도적으로 여행을 준비했다.


그리고 여러 권의 파리 관련 책을 샀다. 프랑스어도 한마디 할 생각으로 기초 회화책도 샀다. 블로그에는 공부할 예술가들의 목록을 정리해서 올려두었다.


파리를 씹어 먹겠다는 심정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행을 떠날 날이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 언니가 갑자기 여행을 못 가겠다고 했다! 내가 이 여행을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너무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잠을 자면서 스트레스를 풀던 사람인데 잠도 못 자고 눈물이 다 났다.


파리 여행에 쏟은 정성이 커서 그런지 다음날 나 혼자라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다행히 에어텔 취소 비용은 언니가 다 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혼자 떠나는 여행을 준비했다. 항공 비용도 날짜가 임박해서 잡으려니 비쌌지만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주저 없이 예약했다. 혼자 떠나려니 숙소는 호텔에 묵는 것보다 한국 사람들이 있는 한인 민박이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출발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열 군데 정도 긴급 문의를 해놓고 답변을 기다렸다. 숙소는 ‘파리의 미친 집‘이라는 곳으로 정했다. 이름이 미심쩍었지만, 게시판에 후기들이 다 좋았고, 사장님이 벤츠로 투어를 시켜준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이렇게 여행에 필요한 큰 두 가지를 예약하고, 휴가 가기 전 회사 업무를 정신없이 정리하고 소소한 여행의 준비물들을 챙기며 어느덧 여행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파리 여행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아니 사실은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애정이 마구 샘솟던 시기인 남자친구와 밤늦게까지 통화를 하고 잔 나는 아침에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아빠가 들어와 깨워주지 않았다면 나는 비행기를 놓쳤을 것이다. 달리고 달려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고, 나는 잊지 못할 첫 홀로 자유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 때 자취를 한 일도 없어서 오롯이 혼자 하는 첫 번째 경험이었다. 언어도 환경도 다른 곳이라 긴장이 됐지만 하루하루가 충만한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민박집이 있던 동네를 걸으며 모두 다른 모습의 아름다운 집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녹음을 자랑하는 동네 공원에서 조깅하는 파리 주민들을 보는 것도 재밌었다. 두 눈 가득 지베르니의 살아 숨 쉬는 모네를 담고, 오베르 쉬즈 우아즈에서 고흐의 고독한 마지막을 함께 걸었다. ‘미친 집’ 사장님의 벤츠를 타고 달려 도착한 항구도시 옹플뢰르에서 달콤한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재즈 트리오의 흥겨운 연주도 즐겼다. 생각보다 추운 파리의 에펠탑에서 바람을 사정없이 맞으며 덜덜 떨던 기억도 이제는 즐거운 추억이다. 그리고 식당에서 [윈 꺄하f도 씰부쁠레] 라고 공부했던 문장도 사용했다. 수돗물 주세요라는 말인데 돈 안내고 마실 수 있는 무료 물을 달라는 말이다. 식당 주인이 약간 갸우뚱했지만 알아듣고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며 너무 신났다. 내가 프랑스 말을 하다니! 내 말을 알아듣다니!!


여행도 인생도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은 있다. 갑자기 틀어진 일정에 일행을 원망하며 여행을 포기했다면 내 인생에 파리 여행은 없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혼자라 더 파리를 온몸으로 가득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모든 일에 외부의 조건보다는 나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내 목표만 확고하다면, 일이 이리저리 틀어져도 길을 찾을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고! 하자.

아름다운 항구도시 옹플뢰르
옹플뢰르를 아름답게 추억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었던 재즈 트리오
화질이 매우 안 좋은 수련 연작. 이 그림을 내 생에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