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고도화의 필요성
많은 중소기업들이 UX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UX는 실무에서 개발이나 디자인에 우선순위가 묻혀 무시되곤 합니다. 이번 칼럼은 왜 UX가 비즈니스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멋지게 차려입은 은행 직원들이 은행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더니 행인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사은품이 있으니 앱 하나만 깔아달라는 것이었죠. ‘성냥팔이’도 아니고 ‘앱 팔이’라니. ‘도를 아십니까’와 ‘스티커 하나 붙여주세요’에 당해봤지만 이런 앱 다운로드 영업은 처음이었습니다. 창구 업무는 뒷전으로 밀려나버린 은행원들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냥 전단지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도를 아십니까도 아닌데, 은행원들까지 무시해야 하다뇨. 반대로 은행원 스스로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요.
은행원들이 길거리로 나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2016년부터 비대면 계좌 개설이 법으로 허용되고 모바일뱅킹이 활성화되면서, 은행 간 앱 가입자 모시기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은행 경영진은 핵심 성과지표(KPI)에 앱 가입자 수를 포함했고 직원들은 영업에 몰아붙여졌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숫자에만 몰두하는 이러한 양적 경쟁의 영업 방식이 정말 효과가 있느냐입니다. 실제로 일부 은행원들은 창구에서 고객 몰래 고객의 폰에 앱을 다운로드했습니다. 실적만 높으면 되기 때문이죠. 또 어떤 고객들은 설치 인증만 하고 앱을 삭제했습니다. 고객은 사은품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허수만 90%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실 사용도도 무척 낮았습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결국 은행들은 앱 가입 실적을 행원 성과 평가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런데 은행들이 그렇게 원하던 성과를 단 12시간 만에 해낸 곳이 있습니다. 전국의 10만 은행원이 1년간 ‘앱 팔이’라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해내지 못했던 성과를 서비스 출시 첫날에 말입니다.
‘서비스 시작 12시간 만에 18만 7000좌 돌파’ 인터넷 전문은행 ‘카카오뱅크’가 서비스 오픈 당일인 2017년 7월 27일 세운 기록입니다. 시중은행들이 1년간(2016년) 개설한 개설 건수는 15만 5000좌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카카오뱅크가 한나절 만에 훌쩍 뛰어넘은 것입니다. 닷새 만에 100만 좌, 한 달 만에 300만 좌를 돌파한 카카오 뱅크는 인터넷 전문은행의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오프라인 지점 한 곳 없고, 영업사원 한 명 없는 카카오뱅크가 오직 ‘앱’ 만으로 기존 거대 은행들을 제치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카카오뱅크의 힘은 단순히 카카오 브랜드를 잘 활용하고, 이모티콘을 썼다는 점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결정타는 바로 기존 은행 앱 사용자들이 겪은 ‘불편함의 해소’였습니다. 사용자들에게 모바일뱅킹이 쉽고 재밌는 일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 겁니다. 저도 카카오뱅크 앱이 나오자마자 즉시 사용해보았는데요, 가입부터 감격이었습니다. 쓸데없는 것들 다 걷어내고 가볍게 등록 플로우를 마쳤다는 데에 놀랐습니다. 전체적으로 정말 쉽고 편리했습니다. 그동안 사용했던 은행 앱들과는 다른 차원이었죠. 다른 앱들이 잡다한 레이블을 화면에 구겨 넣는데 반해 말입니다. 실제로 카카오뱅크는 ‘같지만 다른 은행’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차별화된 UX디자인이 핵심 전략임을 밝혔습니다. 시중은행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선언이었죠.
아무리 우수한 기술과 콘텐츠를 가지고 있더라도, 소비자가 접점에서 느끼는 UX 구성에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성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첨단 기술이나 다양한 콘텐츠를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양한 기능의 단순한 사용성 혹은 서비스의 효용이 아니라 사용 자체의 긍정적인 경험과 의미입니다.
2000년대 초반, 소니(Sony)와 애플(Apple)은 디지털-콘텐츠 서비스의 융합 플랫폼 시대를 예상했습니다. 그때 두 기업의 비전은 비슷했죠. 그러나 지금 애플이 명실상부 글로벌 톱으로 떠오른 반면, 소니는 과거의 평판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 두 회사의 희비는 통합 플랫폼 서비스의 사용자 경험을 얼마나 매끄럽게 구축했느냐에서 엇갈렸습니다. 애플은 사용자와 콘텐츠가 만나는 접점의 고도화를 위해 모든 역량을 기울인 반면 소니는 제품의 기능과 디자인 측면에만 집중하고 사용자의 경험 통로를 매끄럽게 하는 데엔 소홀했죠.
2000년대 후반, 싸이월드나 마이스페이스(MySpace)는 똑똑한 UX 디자인을 채택하지 않아 쇠락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사용자의 경험과 목적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지금까지 생존해 오고 있습니다.
2010년대 초반,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스마트 TV사업은 비참히 실패했습니다. UX조직을 확장하고 인재를 영입해 내부 역량을 강화했지만, 시청자들은 익숙한 구식 리모콘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고, 화면은 복잡해서 정작 사용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통합 결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콘텐츠 경로별로 따로 결제해야 했고 영화를 보려면 몇 차례나 스크롤링을 해야 했죠.
이제 우리 회사가 ‘기능적 가치’만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심미적 디자인’만 추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을 해봅시다. 만약 그렇다면 기업의 ‘비전 선언서’(Vision Manifesto)부터 UX적 가치를 담아 바꿔봅시다. 아마존은 ‘지구에서 가장 고객 중심적인 회사가 된다’는 선언서로 세계 최고의 유통 서비스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반면 쇠락한 유통기업 반즈앤노블스의 사명은 ‘최고의 전문 소매사업자’였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당장의 양적 성과에 집중하게 됩니다. 당장의 성과가 경영자를 안심시켜주니 말이죠. 하지만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지속경영(Sustainability Management)을 위해 UX는 분명 투자가치가 있습니다. 경영자가 UX 고도화의 쓸모와 그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판단해 전략적으로 충분히 이용한다면, 혁신 기업으로 지속 가능한 성공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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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영 전략가(Strategist)
브랜드경험 디자이너·컨설턴트.
www.wedidit.kr / 0507-1317-7477 / cody@wedidi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