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시쟁이고, 교수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냥 학원쟁이일 뿐이지만 나름 배우기는 참 대단한 분들한테 많이 배웠다. 운이 좋아서. 내가 배웠던 수업 중에 가장 좋았던 수업은 단연 한예종에서 배운 희곡분석 수업이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통찰력 넘치는 수업들이었다. 예술은 질문에서 나온다라는 나의 기본철학도 그때 형성된 것 같다. 일단 나는 대본이 좋았다. 소설보다 희곡이 좋았던 이유는 희곡은 소설보다 덜 완성된 듯, 더 많은 빈 공간을 가진 장르라 개인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갈매기의 니나는 저마다 다른 니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갈매기가 위대한 희곡인 거다. 내게도 니나는 계속 달라진다. 내 삶의 경험이 더해질수록 이상하게 니나의 이미지가 바뀐다. 캐릭터들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예전엔 패배자요 포기자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던 갈매기의 마샤가 나이를 먹고 보니 갑자기 주요한 인물로 와닿는다. 사랑 앞에서 모든 실존을 잃어버리는 뜨레블레프보다 가늘지만 긴 삶 속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마샤가 어쩌면 인생을 더 잘 이해한 캐릭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다는 걸 깨닫는 일이란 생각을 하면서
희곡의 맛이란 그런 거다. 빈틈 채우기 텍스트보다 서브 텍스트, 그 서브 텍스트에 하늘의 별자리처럼 다양한 내 삶과 통섭적으로 경험하기…. 그런데 희곡을 더 잘 읽는 비결은 질문하면서 읽는 거다. 그때 깨달았다. 예술은 질문하기에서 나오는 거구나. 예술에서의 창의성은 질문에서 나오는 거구나. 질문할 줄 아는 학생 스스로 질문할 줄 알고, 스스로 대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예술적 성장 과정이며, 이런 방식의 가능성을 갖춘 학생을 한예종 입시에선 원하는구나…. 이런 부분에 어느 정도 깨우친 다음부턴 입시가 이상하게 술술 풀리더라. 지도하는 학생들이 더 많이 합격하더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예를 들어보자.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하는 위대한 텍스트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5막이 항상 의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4막에서 끝나도 되는 이야기 아닐까? 네 명의 청춘남녀와 요정부부의 재미있고 낭만적인 소동 이야기. 이게 ‘한여름 밤의 꿈’ 아닌가? 왜 막노동 꾼 같은 자들이 만든 연극과 그 연극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연희 내용을 담은 5막이 존재해야 하는 걸까? 항상 의문이었다. 특히 5막에 인용된 공연형태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서사가 존재하고 인간이 동물 역, 심지어 돌담 역도 하는 의인화라니. 연극성이 뛰어난데 이런 5막이 왜 존재할까? 그런 의문들이 있었다. 이런 질문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양정웅의 ‘한여름 밤의 꿈’이 5막을 거세했다는 점에서 별로라고 생각하게 되거나 아니면 5막만 따로 떼어내서 진짜 연극을 만드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로 꾸미고 그들의 소동을 메타연극으로 풀어봐도 재밌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의문을 가지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해본다. 갈매기를 거꾸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창동 박하사탕처럼 갈매기의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이 되게 해서 뜨레블레프가 권총 자살하는 장면이 첫 장면이고 이야기의 마지막은 희망에 찬 니나의 육성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가슴 설레고 호기심에 찬 니나의 모습이 극의 마지막 니나의 모습이라면 어떨까? 그러면 마치 인간, 사자, 독수리, 뇌조…. 이 명대사도 새롭게 생명을 얻을 텐데…. 이런 의문을 가지고 갈매기 대본을 각색해서 대학로에서 공연한 적도 있었다. 비록 공연 자체는 엉망진창이었지만, 거기서 주역을 했던 아마추어 배우가 그 다음 해에 한예종 전문사에 합격해버려서 모두가 놀라기도 했다. 학원공연이라고 우습게 봐선 안된다. 이처럼 좋은 배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도 있으니까.
<한여름 밤의 꿈>에 대한 이런 질문들은 결국 <한여름 밤의 꿈>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들을 깨달아 한층 더 재미있게 대본을 읽게 했다. 만약 몰랐다면 얼마나 이 작품을 단편적으로 봤겠는가 생각하면 아찔하다. 집요한 질문들을 통해 결국 <한여름 밤의 꿈>의 5막은 연극에 대한 상징이며 연극을 하는 사람들과 연극을 보는 관객들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존경의 의미 그리고 더 나아가 연극의 미래에 대한 통찰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400년이 지나 브레히트의 서사극적 요소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5막에서 느껴진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며 연극에 대한 그의 통찰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입증하는 예라 하겠다.
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과 <한여름 밤의 꿈> 5막을 견주어보면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한여름 밤의 꿈> 5막처럼 아주 연극적인 부분이 햄릿의 5막 1절 무덤지기 씬인데 이것 역시 비약적인 부분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대본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비약이 처음에는 거슬렸지만,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서 셰익스피어의 대본에 있는 비약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마약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리어왕의 광대의 대사 속에 숨겨진 실존적 메시지들은 정말 시대를 뛰어넘는 실존적 질문의 핵심을 갖추고 있고 햄릿의 5막 1장도 이상하게 끼어들어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만 결국 그 빈 공간 때문에 햄릿이란 작품이 한층 입체적으로 된다.
<한여름 밤의 꿈> 역시 비약적인 다층플롯에 이어 5막의 존재를 통해 연극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는. 사육제 - 중세의 그 엄격한 율법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뜨거운 디오니소스적 축제의 밤. 연극에 대한 풍부한 셰익스피어의 애정과 헌신이 작품 속에선 묻어나온다. 마지막 장면에서 퍽의 대사는 감동적이다. 셰익스피어의 분신과도 같은 퍽의 대사는 <우리 읍내>의 무대감독의 마지막 대사처럼 관객을 압도하고 연극이란 마법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비록 우리의 작품이 보잘것없더라도 조금만 인내해주신다면 머잖아 더 나은 연극으로 보답할 것을 이 퍽이 약속드립니다….’ ‘고마우신 관객 여러분 우리 읍내도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퍽과 무대감독의 마지막 인사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아름답다.
창작은 빈 곳에 무언가를 써대는 게 아니다. 창작을 그렇게 생각하니 답이 안나오는 거다. 짜증나는 훈련이 되어 버리는 거다. 질문이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겹쳐보고 왜 이럴까 질문해보고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질문하는 것은 영화적 작업에서 필수적이다. 공간, 인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이창동의 영화를 보면, 삶과 사람에 대한 관찰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걸 항상 느낀다. 특히 <시>에서 그렇다. 그 어둡고 좁고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지루한 그 미자와 손자가 함께 사는 그 공간을 생각해보라. 그 공간에서 손자가 틀어놓은 TV 소리와 손자 방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를 끄지 못해 절규하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여인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라. 그 장면에서 각각 노인과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을 동일하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느껴보라.
창작은 쓰는 게 아니다. 보는 거다. 궁금해하면서 보는 거다. 왜? 라는 질문을 하며 보는 거다. 왜 저렇게 살까? 왜 저렇게 열심히 일해도 저렇게밖에 보상받지 못할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왜 소녀상이? 왜 촛불이? 왜 광화문엔 사람들이 저렇게? 왜? 라는 질문을 통해 희곡을 읽고 영화를 보고 주변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끊임없이 자신만의 답을 채워가는 작업이다. 그 답들이 어느정도 정리되면 창작의 밑거름으로 훌륭한 예술의 시작점이 될 거라 예술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뛰어들기 원하는 여러분이라면 창작은 질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텅 빈 종이에서 시작하지 마라. 창작은 빈틈 채우기다. 나만의 빈틈 채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