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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Dec 05. 2019

예술가의 현실장애도 괜찮다

예술가에겐 약간의 현실 장애도 나쁘지 않다. 괜찮다. 정말이다. 주변의 예술을 하는 친구들이 현실에선 좀 어설픈 모습을 종종 본다. 다들 빠릿빠릿하게 자기 살길 잘 찾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선 튀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좀 뒤처져 보이기도 하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친구도 많다. 이들은 연애도 항상 뭔가 문제 있는 연애를 하고 우울함 속에 빠진 친구들도 많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이런 현실장애는 문제가 될까? 이런 부족한 현실 감각이 예술가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서툰 현실의 삶이 축복이 되는 이유


어떤 남자가 여자를 유혹해 많은 관계를 맺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이 남자에게 섹스와 유혹은 자신의 확장이다. 모든 인간은 이처럼 자신을 확장하고 싶어 한다. 특히 10대 후반, 20대는 그 욕구가 누구보다 크다. 그래서 사회는 대학이라는 대체재를 만들어 냈다. 자아실현을 위한 그 폭발적인 에너지를 대학입학과 동일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실 명문대학을 가려는 진짜 이유 역시 일종의 자아 확장을 위한 욕구 때문이다. 명문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려는 것도,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으려는 것도, 유명한 배우가 되고자 하는 욕망도,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 혹독한 경쟁과 훈련을 견뎌내는 것도 모두 자아 확장을 위한 욕구 때문이다. 


다시 예술가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예술가가 현실의 삶에 서툰 것이 때로는 축복이 되기도 한다. 왜일까? 현실에서의 빈약함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려 애쓰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 말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왕자웨이 감독의 실제 삶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가 돈 계산에 능숙한지, 눈치가 빠른지, 몸은 건강한지, 말을 잘하는지, 길치인지, 연애에 서툰지, 성적 불만족이 없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왕자웨이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왕자웨이는 오직 그의 찬란한 영화적 업적을 통해 우리에게 기억될 뿐이다.


영화 '화양연화'


왕자웨이, 윤동주 그리고 히치콕


나는 <화양연화>나 <아비정전>을 보며 그의 찬란한 예술혼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왕자웨이를 만났다. 그것도 매우 밀접하게 교감했다. 바로 그와의 예술적 교감을 통해서다. 어쩌면 실제보다 더 깊은 교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과 인간이 실제로 나눌 수 있는 교감은 동시대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실제로 교감할 수는 있겠지만 (모르는 일 아닌가. 혹시라도 황제 테니스 코트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 아니면 교회를 가거나) 윤동주와는 불가능하다. 물론 셰익스피어와도 교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를 통해서는 시대의 장벽을 넘어 지금 당장에라도 생생한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통찰 역시 시간과 국경을 넘어 지금 바로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예술가에게 시간과 공간의 장애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혹 신체에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의 모습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만일 예술을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부적응의 문제들을 넘어 오직 예술적 완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어떨까? 현실의 나는 비록 부족함이 많다 해도 예술을 통해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 역시 매력 있는 일 아닐까? 작품을 통한 한 인간의 확장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광범위한 교감을 낳는다. 오늘날 우리가 죽은 히치콕과 교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피라미드 속 이집트 파라오가 영원한 삶을 위해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듯이 우리 역시 예술작품을 통해 영원히 죽지 않을 자신의 확장을 꿈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결핍과 상처, 억압과 분노를 이기는 힘


내가 만난 훌륭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결함을 갖고 있었다. 현실 부적응자들이 많았고 그래서 상처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서의 부족한 부분과 상처, 부적응, 계속되는 실패를 자아를 확장하는 위대한 원동력으로 삼을 줄 알았다. 현실에서 좀 서툴면 어떤가? 예술을 통해 자신의 모든 욕심과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해보자. 현실의 결핍과 상처, 억압과 분노를 예술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입시에서 성공한 학생들(특히 연기 쪽) 역시 다들 범상치 않은 인생사에 소소한 결핍과 상처들을 안고 있었다. 나 역시 현실의 장애를 이겨내고 나를 확장하기 위해 이렇게 글을 싸지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보잘것없는 글들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삶의 이유가 된다. 현실에서의 장애도 나쁘지 않다. 예술작품으로 역전시키면 된다. 그 역전이 짜릿하기에 예술은 비로소 할만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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