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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Dec 05. 2019

천진한 낙관주의는 곤란하다

‘예술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생각했든 간에 최소한 ‘천진한 낙관주의’여서는 안된다. 입시를 준비하다 보면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대책 없는 낙관주의들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연극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어요’ ‘연극을 통해 진실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영화를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어요’ ‘영화를 통해 제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그중 내가 특히 싫어하는 것은 ‘연극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요’라는 말이다. 특히 그 말을 하는 친구 역시 아직 상처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을 때 더욱 신뢰가 떨어진다. 이런 말을 들은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당신 자신의 상처부터 치유하고 오세요’


예술은 무조건 잘해야 한다


예술이 치유와 사회변화의 수단이 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물론 나 역시 궁극적으로는 예술이 치유의 수단이자 사회변화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게 하려면 맨 먼저 ‘형식적 수월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교회 선교극을 생각해보면 쉽다. 메시지가 주가 된 예술을 생각해보라. 극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애를 쓰지만, 예술적 형식미와 수월성이 전혀 뒤따라주지 않는 게으르고 성급한 예술을 생각해보라. 결국, 그 메시지조차 추한 것으로 전락시키지는 않는가? 예술에서 메시지는 곧 형식적 수월성이다. 쉽게 말해 잘해야 좋은 거고, 잘하는 놈이 착한 거고, 잘하는 놈이 멋진 거란 말이다. 예술은 무조건 잘해야 한다. 어설프게 하면서 잘 봐달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당신의 메시지가 귀하고 고결한 것일수록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형식적 수월성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형식의 수월성이 있고, 그다음에 비로소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세계에서는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 숭고함의 표현일 수도 있다. 나 같이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은 폭력이나 사회문제, 선정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고통이나 비관론으로 가득하면 이른바 ‘사탄의 예술’로 너무 쉽게 치부하곤 한다. 예술작품의 껍데기나 분위기, 아니면 드러난 면만으로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대하는 문화진흥위원회나 기존의 문화 담당자들, 심지어 평론가나 대중들의 태도도 비슷하다. 그의 영화적 형식과 소재, 표현을 두고 ‘악’한 영화로 함부로 규정짓거나 쉽게 거부하는 모습을 흔히 만난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는 실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한국사회는 ‘낙인의 사회’다. 한번 낙인이 찍히면 쉽게 헤어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매우 중요한 가치다.


우리가 사는 시대 그 자체가 폭력과 광기, 자기 파멸적 욕망과 상호파멸적 욕정으로 뒤덮여 있다면, 그것을 묘사하는 작품이 어둡고 광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품이 외설과 폭력,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그것을 만든 예술가 역시 악마적 존재라고 쉽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돈으로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자본주의의 민낯을 예술가의 양심으로 통찰을 담아 묘사하는 것은 오히려 필요한 일 아닐까? 나는 그러한 고통에 직면할 수 있는 예술가적 숭고함이 때로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


극작가가 된 어떤 의사 이야기


이런 생각을 한다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분 있다. 그는 의사였다.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채 낙오한 수만 명의 사람과 그 아픔과 고통, 눈물과 좌절을 공유했다. 모든 종류의 희로애락을 관찰하며 그 모습을 성실하게 반추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의사다운 예리한 관찰과 과학적 통찰을 담아 인간의 삶을 새로운 극적 형식에 담아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낙오자들이며, 패배자이고, 위선자들이며 좌절한 자들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어떠한 섣부른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연민과 소통의 단절, 좌절된 꿈으로 가득하다. 그의 작품으로 올려진 무대는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인생에서 재미없는 것을 드러내고 남은 것이 드라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 형식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무대 위를 무의미한 일상과 사소한 행동들로 가득 채우면서도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은폐시켰다. 그런 그의 작품은 천재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와의 만남을 통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사실주의에 혁명의 불길을 댕겼다.


그의 작품들이 주로 인생의 절망을 다룬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숭고함과 진정성, 깊은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바로 러시아의 위대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에 관한 이야기다. 올해 연극원의 지정 희곡이 바로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벚꽃 동산’이다. 나는 어설프고 게으른 낙관주의야말로 오히려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본다. 그러니 예술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예술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말 역시 마음속으로 삼키라. 일단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고 싶다면 반드시 예술적 수월성과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성에 직면해야 함을 전제하라. 그리고 천천히 뚜벅뚜벅 주어진 길을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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