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창덕궁 인정전
2. 창덕궁 인정전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다. 하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경복궁을 사용했던 건 절반인 250년도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한 건 흥선대원군, 그렇다면 그동안 조선의 왕들은 어느 궁을 이용했을까?
조선의 왕들은 여러 궁을 사용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인덕궁, 법궁의 규모를 자랑했던 인경궁도 사용했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5개의 궁궐들도 사용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버린 후 고종 때까지 복원되지 않아 실제로 조선시대 왕이 등극했던 곳을 살펴보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왕보다 창덕궁의 인정전에서 즉위한 왕이 더 많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이 주로 사용되다 보니 두 개의 궁을 주로 비교하게 된다. 경복궁, 창덕궁 모두 여러 차례 화재로 불탄 후 복원되었는데, 창덕궁은 원형의 형태와 주변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 형태를 띠고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창덕궁과 경복궁은 입구에서부터 차이점이 느껴진다. 우리가 각각의 궁궐에 들어갈 때, 경복궁의 광화문은 궁궐의 중앙에 위치해 있지만, 창덕궁의 돈화문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경복궁의 정전과 달리 입구인 돈화문에서 바로 보이지 않는다. 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서 금천교를 건너서 걸어가다가 또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인정문을 지나야 북악산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인정전이 보인다.
대학시절 ‘조선왕조실록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들었었는데, 그때 교수님과 경복궁에 간 적이 있었다. 경복궁의 교태전에서 설명해주시길, 경복궁의 전각들은 광화문을 기준으로 일직선으로 주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교태전 앞에 있는 모든 전각들의 문을 열면 광화문까지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적이 있다.
그에 비해 창덕궁의 전각 배치는 조금 다르다. 전각들이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대부분 배치되어 있지만, 경복궁처럼 계획적으로 설계된 궁궐이 아니고 자연을 훼손을 최소화시켜 지은 궁궐이라 전각들이 경복궁에 비해 가로로 퍼져 있다. 그리고 경복궁을 돌아다녀보면 거의 언덕이 느껴지지 않는 형태이지만, 창덕궁을 돌아다니다 보면 평지라는 느낌을 주는 곳은 동화문에서 인정전을 가는 길 정도이다. 인정전만 해도 약간 경사져 있고, 안쪽의 전각들을 들어가면 궐내각사도, 낙선재 영역들도 전부 평지가 아닌 곳에 전각이 지어져 있다.
태종 때 이궁으로 지어진 창경궁의 모습은 지금과는 달리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을 살펴보면, 이조판서 박신이 인정전이 좁으니 고쳐지어야 한다는 건의를 한 적이 있다.
박신이 또 아뢰기를,
"인정전(仁政殿)은 매우 좁으니 고쳐 지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집은 이궁(離宮)이라 비록 좁더라도 좋다. 만약 대사(大事)가 있다면 마땅히 경복궁(景福宮)으로 나아가겠다. 또 바로 산맥(山脈)에 당하였으니 개조(改造)하기도 어렵다."하였다.
태종 17년 윤5월 12일 정묘 6번째기사 / 이조 판서 박신이 인정전을 재건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듣지 않다
좁더라도 했던 태종은 그 후 신하가 재차 인정전을 고쳐짓는 상소를 올리자 인정전을 고쳐 짓게 된다. 그렇게 인정전은 세종 1년 완공되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신(朴信)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지난번에 인정전(仁政殿)을 고쳐 짓는 역사를 정지하라고 명한 것은 오로지 가뭄을 근심해서 였다. 그러나, 가뭄이 비록 심하더라도 일 가운데 마땅히 해야 할 것은 곧 폐지할 수 없다. 더군다나 금년의 가뭄은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다. 우리 태조(太祖)가 초창(草創)하던 처음에 곧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내가 그 뒤를 이어 곧 창덕궁(昌德宮)을 지어, 능묘(陵廟)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오직 이 인정전(仁政殿)은 협착(狹窄)하므로 마땅히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는 백성을 괴롭히는 중사(重事)이므로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는데, 속히 영조(營造)하려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요컨대 소민(小民)을 부리는 책임을 나의 자신에 당(當)하게 하고, 세자(世子)가 즉위(卽位)한 뒤에는 비록 권토(拳土)450) 촌목(寸木)451) 의 역사라도 백성들에게 더하지 못하게 하여서 깊이 민심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7월 5일 계축 2번째기사
그리고 연산군은 인정전을 수리하면서 청기와로 이어야 한다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었다.
전교하기를,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은 모두 청기와로 이어야 한다. 사찰도 청기와를 이은 것이 많은데, 하물며 왕의 정전(正殿)이랴. 그러나 청기와를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우니 금년부터 해마다 구워 만들어 정전만은 으레 청기와로 이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1월 6일 정해 3번째기사 / 인정전과 선정전을 모두 청기와로 이도록 하다
현재 인정전의 모습은 청기와가 올라가 있지 않지만 인정전 옆에 있는 선정전의 청기와를 보며, 같은 색의 기와가 인정전에 올라가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게 된다.
이후에도 실록엔 인정전의 기록은 꾸준히 나타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라지긴 했으나 광해군 때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 창덕궁이었고, 창덕궁의 정전이 바로 이 인정전이었기에 모든 왕의 실록에 등장하는 전각이다.
그래서 나는 인정전을 볼 때면 조선의 희로애락을 겪은 전각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태종부터 시작해서 조선의 끝이었던 순종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 동안 불타서 없어지기도 하고, 다시 복원을 하는 동안 다양한 일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 씨의 책봉식과 사도세자의 가례 역시 이곳에서 치러졌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인정전에 나아가니, 백관이 조복(朝服)을 입고 차례대로 서 있었다. 진책관(進冊官)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霔)와 진보관(進寶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보내어,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으로써 중궁 심씨(沈氏)를 책봉하여 공비(恭妃)를 삼았다. 비(妃)가 내전에서 예를 갖추어 책봉을 받고, 명부(命婦)의 조알(朝謁)을 받고, 승주와 대림(大臨)에게 옷의 겉감과 속감을 내려주었으며, 경창부 윤(慶昌府尹) 심징(沈澄)에게 명하여, 전(箋)을 올려 책봉을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그 책문(冊文)에,
"왕화(王化)의 기초는 실상 내조(內助)에 힘입음이 있으며, 인륜의 지극함은 마땅히 이장(彝章)102) 을 구비해야 될 것이다. 이에 휘칭(徽稱)을 들어 현책(顯冊)을 밝힌다. 오직 심씨(沈氏)는 단정하고 정숙하며, 유순하고 공손하다. 생각이 나라를 근심하는 데 있으매, 항상 경계(儆戒)의 도를 올리고, 마음이 조심하는 데 있으매, 일찍이 연안(宴安)의 정(情)이 없었다. 마땅히 함항(咸恒)103) 에 덕이 짝할 것이요, 풍아(風雅)104) 에 아울러 찬미(讚美)할 만하다. 정사를 볼 초기(初期)에 있어 욕례(縟禮)의 더함을 엄하게 해야 될 것이므로, 이에 명하여 왕공비(王恭妃)를 삼고 책(冊)과 보(寶)를 주니, 더욱 상서(祥瑞)를 맞이하여, 길이 큰 경사를 받을 것이다. 화평하게 숨은 교화(敎化)를 펴서, 편안한 모계(謨計)를 만년까지 전하고, 왕후의 덕을 바루어, 큰 경사를 백세에 전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상세하게 알 것이다."
하였다. 인(印)은 왕공비(王恭妃)의 인이라 하였다. 악장(樂章)에,
"하늘이 우리 왕을 돌보아, 이에 그 비(妃)를 세웠다. 군자의 좋은 배필이니, 신(神)과 사람이 모두 의지한다. 유화(柔和)하고 훌륭함은 모범이 될 만하고, 선량하고 신중함은 그 몸가짐이다. 많은 복을 주니,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고 하였다.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1월 10일 병진 1번째기사 / 중궁 심씨를 책봉하여 공비로 삼다
이날 왕세자의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임어하니 궁관(宮官)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들어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서계(西階)로 올라가 자리에 나아가 서남쪽을 향하여 섰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술을 술잔에 따르고 사옹원 정(司饔院正)이 찬탁(饌卓)을 올리니, 왕세자가 자리에서 내려와 술을 입에 댔다가 떼고 나아가 어좌(御座) 앞에 꿇어앉았다.
영조실록 59권, 영조 20년 1월 11일 기축 2번째기사 / 왕세자의 가례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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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조선의 미래를 이끌 사람들을 뽑아 과거를 치르고 합격자들에게 증서를 수여하기도 하고, 기록에서 외국 사신들의 칙서를 맞이하고 연회를 베푼 기록도 등장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선조가 백성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난 곳도 인정전이었다.
새벽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 관찰사 권징(權徵)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30일 기미 1번째기사 /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
최근에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읽었는데, 책에 담긴 임진왜란 당시의 백성들의 힘든 삶을 보며 실록엔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라고 쓰여있는 한 줄이 그 당시에는 그들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었을진 몰라도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정말로 무책임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징비록엔 전쟁 당시 왜군들의 무차별적인 살육의 내용이 적혀 있는데, 그 와중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간 것도 모자라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게 참 어이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