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덕수궁 석어당과 즉조당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나서 어떤 전각을 첫번 째로 쓰면 좋을까 많은 고민을 했다. 석어당은 덕수궁의 전각 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각이라 고민이 많을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덕수궁에 방문하면 중화전의 뒤쪽 석축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멍때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석어당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석어당에 담긴 이야기를 하려니 석어당 하나만을 이야기하기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왜냐면 지금의 석어당은 예전의 석어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뒤쪽엔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2층짜리 전각 하나와, 중화전과는 완전히 평행은 아닌 1층짜리 전각이 하나 있다.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전각은 석어당, 1층짜리 전각은 즉조당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석어당은 고종 때 침전 건물을 새로 지으며 즉조당에 있던 현판을 옮겨 달게 되면서 석어당이 된 것이고, 그 이전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석어당은 현재의 즉조당이다.
처음 궁궐의 전각들에 대해서 공부했을 때, 각 궁의 정전을 먼저 공부하고 그 다음엔 각 궁에서 내가 좋아하는 전각들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관심있는 전각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보고 있는 석어당과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석어당의 기록이 달라서 ‘이게 뭐지? 원래 있던 전각을 개보수 하면서 모양이 지금 처럼 된 것 인걸까?’ 했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해석본이 올라와 있는 사이트에서 ‘석어당' ‘즉조당' 으로 검색해보며 하나씩 읽어본 결과 고종 실록 이전의 석어당과 이후의 석어당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단청이 칠해진 1층짜리 전각은 과거엔 별다른 이름이 없다가 영조 41년
임금이 ‘석어당(昔御堂)’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卽阼堂)에 현판(縣板)을 걸게 하였으니, 바로 경운궁(慶運宮)이었다.
이라는 기록으로 즉조당에 석어당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전의 기록에서는 광해군일기에 ‘정릉동 행궁 서청'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종 때의 기록에서야 “석어당"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는데, 고종 때의 석어당은 현재 석어당으로 불리고 있는 2층짜리 건물이다.
현재의 석어당은 평소엔 2층에 올라갈 수 없지만, 가끔 문화재청에서 2층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 신청을 받아서 올라가 볼 수 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도 2층으로 된 건물이지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는 아닌데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전각(누각을 제외하고) 중에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봄엔 석어당 앞에 있는 살구나무에 꽃이 예쁘게 펴서 꽃이 흩날리면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전각과 잘 어울려서 한복을 곱게 입은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곳이기도 하고, 해가 질 무렵 방문하면 해설사와 동반한 단체 관람객들이 중화전 뒤쪽 월대에 앉아 설명을 들으며 석어당을 바라보고 있기도 한다.
즉조당과 석어당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경복궁 등의 궁궐이 불타 사라져서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을 행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석어당과 즉조당이다. 인조 때 선조가 침전으로 사용했었던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경운궁의 각사들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현재 덕수궁의 전각은 고종 때 불탔던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16년 동안 사용했다고 해서 ‘ 옛 왕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석어당이라고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옆에 있는 중화전만 해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어서 문헌에서 따온 이름인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단순한 작명법이었다.
궁궐 안의 대부분의 전각들은 단청이 칠해져 있지만, 석어당은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건물이다. 덕수궁에 방문하면 1층 문이 열려 있어서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데, 1층은 방과 대청이 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마루가 깔려 있다. 개인적으로 단청이 칠해져 있는 건축물보단 나무 원재료의 색감과 모양이 잘 보이는 건축물을 좋아해서 덕수궁에 방문하면 중명전의 돌계단에 앉아 하염없이 석어당과 즉조당을 바라보고 오기도 하는데,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바라보기엔 이 전각들에 담긴 사연들은 아름답지 않았다.
광해군 때 인목왕후(소성 대비)가 유폐되어 머물렀던 곳이 석어당이다. 학교에서 ‘인목대비 서궁 유폐' 이렇게 사건으로만 배웠어서 어렸을 적에 나는 ‘유폐’라는 단어보단 ‘서궁'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단어 뜻 그대로 서쪽에 있는 궁궐 하나에 유폐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진왜란 직 후라 경복궁을 비롯한 도성의 궁궐이 불타서 사라져 월산대군의 사저와 백성들의 전각을 임시 행궁으로 사용했을 정도면 행궁의 역할을 했기에 ‘궁'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지만 사실 현재 덕수궁의 모습처럼 넓고 많은 전각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출퇴근이나 마트 방문 등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집안에 있는 것도 답답한데 아들을 잃고, 몇 년 동안 감시를 받으며 궁궐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신들은 물론 전하의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과 종묘사직을 부탁한 뜻을 생각하시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성상의 비답에 ‘단지 서궁이라고 칭하라.’고 분부하신 점에 대해서는 신들이 갈수록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경운궁(慶運宮)은 바로 법궁(法宮)입니다. 일단 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상 하루라도 아무 이름이 없는 사람을 이곳에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대비라는 이름이 이미 없어졌는데 어찌 그대로 법궁에 거처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광해 10년 1월 29일 기축 8번째 기사)
라고 신하들이 주청을 올리기도 했으니, 과연 그곳이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성 대비에게도 다시 볕이 드는 시간이 찾아왔다. 존명 사대와 폐모살제라는 명분으로 능양군과 의병들이 반정을 일으켜 궁궐을 장악하게 되었다. 소성 대비는 자신이 유폐당했던 이 석어당의 앞마당에서 광해군은 소성 대비에게 죄를 청하고 능양군(인조)에게 옥새를 건네게 되었다. 능양군은 소성 대비의 명으로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렇게 석어당에 대한 기록은 몇 명의 왕들이 재위를 하는 동안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고종 4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과 함께 나타난다.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의 함녕 전이 불타면서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과 각 전각들이 다 타버렸다.
경운궁(慶運宮)에 화재가 났다. 【함녕전(咸寧殿), 중화전(中和殿), 즉조당(卽阼堂), 석어당(昔御堂)과 각 전각(殿閣)이 모두 탔다.】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4월 14일 양력 1번째 기사 ]
실록에 따르면 고종은 이 건물이 타버린 것을 안타까워 하며 이렇게 말을한다.
"병신년(1896)에 이어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즉조당(卽阼堂)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몽땅 불탔지만 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九成軒)이 아직 온전하게 있는 만큼 그때에 비하면 도리어 낫다. 즉조당으로 말하면 몇 백 년 동안 전해오는 것이기 때문에 서까래 하나 바꾸거나 고치지 않았는데, 몽땅 타 버렸으니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4월 14일 양력 3번째기사 ]
석어당과 즉조당은 건물이 소실된 직후 바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중건하면서 궁궐의 공사 과정을 기록한 기록이 ‘경운궁 중건 도감’이다.
살구꽃이 필 때쯤 덕수궁의 석어당을 꼭 가보길 바란다. 조용할 때 방문하면 덕수궁 옆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정각마다 들리는 종소리에와 달콤한 꽃내음, 그리고 멀리서부터 분홍색 꽃잎이 흩날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지난 걱정들도 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참고 : 한국 콘텐츠 진흥원 - 문화 콘텐츠 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203&index_id=cp02030677&content_id=cp020306770001&search_left_menu=120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중초본), 영조실록, 고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