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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Apr 29. 2019

자두 맛

시를 경험하는 방식



<저기 있잖아>


그 아이스박스에

들어있던

자두

내가 먹었어.


아마 당신이

아침에 

먹으려고 

남겨두었겠지.


미안해 

자두는 참 맛있었어.

어쩜 그렇게도 달고

시원하던지.


-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즈, <저기 있잖아> (1934)


미국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시인 윌리엄즈의 역시나 유명한 이 시는 20세기 시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 시 한 편을 잘 읽어보면 현대시가 기존의 시, 즉 19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중세 이후의 시 형식과 주제 등과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거추장스러운 시적 관습, 운율 리듬 라임 등은 다 접어두고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시라는 정형화된 틀을 깨고 일상적 대화 혹은 쪽지 메모에 쓸 만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런 시도는 모더니즘의 전형적 특성으로, 시와 일상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제목 역시 파격적이다. 한국어 번역도 시의 의도에 맞게 시도해보았는데, 제목 자체가 시의 내용으로 이어질 첫 행의 역할을 한다. 통상 시의 제목은 시 내용이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거나 주요 소재, 가령 이 시의 경우 '자두'정도가 되어야겠지만, 이 시는 제목의 틀을 깨고 대화적 어법으로 말을 꺼낼 때 쓰는 표현을 제목으로 사용한다.  


내용은 일견 단순해 보인다. 아내이거나 룸메이트일 수도 있고 연인이나 혹은 그저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상대가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둔 자두를 꺼내 먹은 화자가 그 사실을 상대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평범하고 너무 사소해서 시적 소재가 될 것 같지 않은 내용을 시에 담는 것은 이제는 당연해보이지만 1세기전에는 파격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혹자는 이 시를 남편이 아내에게 남긴 메모정도로 읽기도 하는데, 시인의 전기적 사실이 그렇다고 쳐도, 독자에게 별 의미없는 정보일 뿐이다. 시를 읽을 때는 시인의 전기적 사실은 참고로 할 뿐 시가 시 자체로 열어두는 언어적 공간으로 들어가야한다. 이 시는 어둔 밤중에 아이스박스를 열어 [누군가 남겨놓은] 자두를 꺼내먹은 화자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그래서, 자두를 먹었는데, 그게 뭐? 등의 반응이라면 이 시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이 시에서 '자두'는 상징적 이미지다. 가령 자두가 아니라 사과이거나 바나나이거나 오렌지 일수도 있다. 딸기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시의 화자가 먹은 과일은 자두여야만 한다. 그건 이 시를 시로 만드는 매우 논리적 필연이다. 독자는 따라서 이 시를 읽을 때는 자두를 한 입 베어물었을때의 시큼하면서 달디단 그 맛을 떠올려야한다. 


아이스박스에서 차고 시원해진 자두는 사과나 바나나, 오렌지에서 느낄 수 없는, 달콤하면서 톡쏘는 죄의 맛을 갖고 있다. 한 여름 더위에 빨간 자두를 한 입 베어물면 과즙이 입안 가득 퍼지고 자두를 든 손도 흥건히 젖어든다. 입술과 입 가에 과즙이 묻으면 혀로 핥아본다. 자그맣고 동그란 자두는 평범한 듯하지만 사실 전혀 평범성과는 거리가 먼, 일상적으로 먹는 뭇 과일과 다른 종류의 경험을 준다.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영어의 '플럼'은 뭔가 비밀스럽게 욕망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은밀하게 터뜨리는 맛은 성적 뉘앙스를 갖고 있다. 


나는 네 '자두'를 몰래 먹었다. 그건 큰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당연 네게는 미안한 일이지. 자두야 뭐 아주 흔하니 구하려면 언제든 구할수있는 것이잖아, 그거 하나 먹는다고 큰 일이 나진 않을거야. 근데 네가 당장 먹어치우는 대신 나중에 더 맛있게 먹으려고 차갑게 얼려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가 먹어버렸으니 말이지, 겁나미안해. 아무리 흔하다고 해도 누군가에겐 정말 소중하게 아끼는 것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지, 그 맛은 정말 말로 표현할수없을 정도로 좋았어. 그 시원하고 달콤한 자두 맛은  진짜 잊을 수 없거든.  

 

- 죄를 짓지 않았어도 모든 달큼시큼한 맛은 원죄의 기억을 불러내기 마련이다. 


이 시에서 자두 대신, 당신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어떤 비밀을 집어넣어 보라. 영어 원문 총 28단어로 구성된 짧고 간결하며 직설적이지만 우리가 품고있는 욕망 그 핵심을 찌르는 이 시는 아마도 당신만의 은밀한 고백시로 탄생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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