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뜰에 말리려고 걸어둔 내 속옷
나는 저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자세히 보니
꿰매고 기운 자국들이 보인다
마치 이사 나온 방처럼
나 아닌 누군가
이제 그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다
내 속옷인데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1927년)
1920년대 서구는 포드주의적 산업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자동차로 상징되는 속도와 번쩍거리는 기계성, 그리고 물질적 풍요로움의 환상에 빠진다.
브레히트와 동시대 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루카치는 이미 인간은 초월적 고향 상실성을 경험한다고 썼다. 저 유명한 소설의 이론 첫대목:
“별이 빛나는 하늘이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보여주는 지도이고 그 길들이 별빛으로 빛나는 시대는 행복하다. 그런 시대엔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도 친숙하고, 모험으로 가득하지만 그 시대에 속한다. 세상은 넓으나 집처럼 아늑하다. 영혼의 불꽃이 저 하늘의 별과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세상과 나, 빛과 불은 확연히 구분되어있으나 결코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이 되지 않으며, 불은 빛의 영혼이고 모든 불은 빛에 싸여있다. 그러니 영혼의 모든 행동은 의미가 있으며 이 영혼과 불의 이중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의미는 완결되고 오감에도 완전하다.”
그리고 노발리스를 인용하며 이 문단은 끝난다. "철학은 향수이다. 철학은 모든 곳에서 집을 찾으려는 충동이다."
브레히트의 시는 낡고 쓸모없어지는 것에 대해 현대인이 경험하는 공포와 자기 소외감을 담고 있다. 시는 단지 얼룩덜룩 기운 낡은 속옷이 창피한 마음만 담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 몸에 제일 가까이 닿아있던 속옷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저 밖에 걸려있는 모습에서 느끼는 낯선 거리감,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느낌이 강하다. 뿐 아니라 내 것인데 아닌 이 기묘한 느낌에는 현대인 특유의 수동성과 소외감이 표현되어있다.
브레히트는 1920년대 내내 현대사회에 전형적인 수동적 인물 군상들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했다고 한다. 20세기가 되자 빠르게 변하는 세계, 특히 기술산업의 발전 속도에 정신없이 자신을 맞추려고 최선을 다하는 적응형 인간을 그려냈다.
이 시의 화자는 물끄러미 자신의 속옷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입었던 것이니 '잘 알고' 있을 수밖에. 그런데 새삼 자세히 보니 꿰매고 기운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몰랐던 사실이 아닌데, 대낮에 외부로 드러난 나만의 치부 같은 속옷. 그리고 순간 그것이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행의 '내 속옷인데'에 이르면, 화자의 소외 경험이 오롯이 다가온다.
이미 백 년 남짓 지난 오늘날 저 시를 읽으면 ‘낡고 누추한 속옷’의 이미지가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몇 번 입지 않고도 버리고 새 속옷을 사는 것은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어렵지도 않다. 싸고 질 좋은 속옷이 소위 널린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에 나도 종종 저렇게 다 헤진 속옷이 걸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낡은 속옷은 내 어머니의 것이었다. 왜 그렇게도 버리지 않고 그걸 입었는지, 때로는 내게 수치심을 안겼던 어머니의 낡은 속옷은 차라리 내 것이 아님에도 마치 내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했다. 어쩌면 유년의 그 기억 때문에 지금 누구에게도 지레 보여주지 않을 속옷을 자꾸 새것으로 바꾸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