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 은 Dec 29. 2020

현실의 프리즘, 언제나 하나 이상의 진실이 있다

월러스 스티븐스

1.

스무 개의 눈 덮인 산 사이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검은 새의 눈동자.


2. 

나는 마음이 세 개다,

세 마리의 검은 새가 앉아있는

나무처럼.


3.

검은 새가 가을바람에 휘돌아 난다

하나의 팬터마임 속 일부이다.


4. 

한 남자와 한 여자는

하나다.

한 남자와 한 여자와 한 마리의 검은 새는

하나다.


5. 

나는 뭐가 더 나은지 잘 모르겠다,

아름다운 억양과

말에 담긴 속뜻 중에서,

검은 새의 휘파람과

그다음에 오는 것 중에서.


6. 

기다란 창문을 채운 고드름

야만적 유리창 위로 

검은 새의 그림자가 

지나쳤다, 이리저리

그 그림자가 남긴

어떤 무드

헤아릴 길 없는 명분.


7.

오, 하담의 메마른 인간들이여

왜 황금새를 상상하는가?

검은 새가 

당신 주변 여성들의

발치에서 걸어다는 게 보이지 않는가?


8.

나는 고귀한 악센트와

명징하고 회피할 수 없는 리듬을 안다.

하지만 나는 또

검은 새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에

연루되어있음을 안다.


9. 

검은 새가 시야에서 빠져나갔을 때

수많은 원환들 중 하나의

가장자리에 표식을 했다.


10. 

초록빛을 받으며 날아가는

검은 새를 보게 되면

심지어 환희의 포주들조차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게 된다.


11

그는 유리 마차를 타고

코네티컷으로 갔다.

한 번은 공포심이 그의 폐부를 찔렀다,

자신이 탄 마차의 그림자를

검은 새로 

착각한 순간.


12.

강이 움직인다.

검은 새가 날아가고 있으리라.


13.

오후 내내 저녁이었다.

눈이 내렸다.

그리고 눈이 내릴 것이다. 

검은 새가 

참죽나무 가지에 앉아있다.


― 월러스 스티븐스, <검은 새를 보는 13가지 방법> 전문



월러스 스티븐스는 미국의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위에 전문 인용된 시는 1923년 스티븐스의 첫 시집 『하모니엄』에 수록되었다. 시인에 따르면 13가지 다른 “감각”을 통해 대상을 묘사한 시라고 한다. 시는 13개의 짧은 연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각각은 독립적인 하나의 시로 보아도 무방하다. 각 연은 검은 새를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13개의 다른 시점과 서술방식을 통해서 하나의 사물을 보는 다양한 시점과 감각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시의 목적은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어떤 종류의 정서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새에 대한 시이지만 새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새의 물질적 디테일은 무시되지 않는다. 사실적 묘사에 기반해서 시인은 새를 보고 경험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전달함으로써 현실은 단일하지 않고, 단 하나의 시선으로 현실 전체를 절대 포착할 수 없다는 시인의 모더니즘적 실재관을 담고 있다. 현실이나 대상은 오직 내가 보는, 고작 한 가지의 시점으로만 다가갈 수 있다.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따라서 개개인의 위치와 보는 방식, 경험의 폭에 제한되어있다.    

 13개의 연은 스쳐 지나가는 정서를 포착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연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단 하나의 옳은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제가 부각된다. 세상이 누가 보느냐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다르다는 인식은 지금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모더니즘에서 비롯된 세계관이다. 스티븐스는 이 관점의 다양성 혹은 파편화된 시점에 깊이 천착한 시인이었다. 


 1연에서 스무 개의, 눈 덮인 산속에서 움직이는 검은 새의 눈동자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 짧은 행들을 반복해서 읽어보면 한 장소가 아닌, 매우 광대한 자연의 풍경이 떠오르고 그 안에 있을 검은 새의, 오로지 두 눈동자만이 묘사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시점은 아주 방대하면서 동시에 매우 미세하다.

이처럼 이 시는 첫 연에서부터 자연, 즉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우리의 시야는 줌 아웃되거나 줌인될 수 있다. ‘눈’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eye”는 카메라의 초점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영어 표현 “I”와 동음이의어로서 주체인 ‘내’가 ‘본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것은 이렇게 내 두 눈동자로 ‘보는’ 것이므로, 광대한 자연의 폭에 비해 매우 협소하다. 이 연에서 대조적으로 부각된 줌 아웃된 너른 자연, 즉 스무 개의 산들과, 줌인된 새의 눈동자는 바로 이 점을 잘 드러낸다.

 

 동시에  산과 새의 눈동자를 보거나 상상하는 시인의 시선(눈동자)이 ‘존재’해서 그 시인을 바라보는 검은 새의 시선도 있음을 알려준다. 내가 바라볼 때 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그 대상 또한 나를 바라본다. 이 장면에서 산도 새도 나를 바라본다. 내가 자연 속에서 풍경을 감상할 때 그 풍경도 나를 보고 있는 경험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인간이 자신도 그 무엇에게 바라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그 시선의 일부로 쑥 빨려 들어간다. 이런 경험을 철학자 칸트는 ‘숭고’라고 불렀고, 정신 분석자 라깡은 ‘응시’라고 했다. 이미 20세기 초에 이 시를 썼던 스티븐스는 모더니즘적 존재론과 인식론의 핵심인 분열된 자아, 파편화된 의식을 이 간결한 시적 문장으로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가령 3연에서 새는 자연의 ‘팬터마임’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팬터마임은 소리나 말이 없이 몸의 움직임만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예술형식이다. 자연풍경에 대한 비유로서 이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으리라. 바람에 휘몰아쳐 날리는 새의 모습은 그 광경을 목격하는 개개 사람의 시선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것이다. 한 편의 팬터마임의 일부로서 이 모든 13개의 편린은 이 새를 바라보는 조각난 시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7연에서 검은 새가 날리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묘사된다면, 11연에 가면 어떤 이에게는 공포와 망상증을 불러일으킨다. 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람에 휩쓸리고 있는데, 바라보는 인간에게는 이유 없는 공포를 자아낸다. 이 새가 검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4연에서 한 남자, 한 여자, 새 한 마리의 등장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들은 모두 하나라고 시인은 말한다. 또 마지막 연에서 “오후 내내 저녁이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이 두 상황은 우리의 상식적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 시행들이 이해 불가능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 그 자체가 다름 아닌 개개인의, 서로 다른 인식과 시점을 증명한다. 너와 내가 서로 다르게 보니, 그것을 표현한 문장은 각자에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시는 상식을 거스르는 언어적 문장을 창조해냄으로써 독자에게 상식 너머의 진실을 보도록 요구한다. 가령 한 남자와 한 여자와 한 마리의 새가 하나라는 문장에서 두 사람과 한 마리의 새가 그림자로 하나가 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또 저녁이 아닌데도 오후 내내 저녁처럼 어둑한 날씨도 떠올려 보라. 


 시에서 제시된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문장은 기실 우리가 언젠가 경험해 봄직한 자연과 인생의 진실을 포착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시점이 한정되고 인식범위에 한계가 있어, 그렇게 본 대로만 보고 생각하는 대로만 보면서, 실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놓치거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제한된 시선으로 편협한 의식으로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동안, 검은 새는 모른척하고 그저 참죽나무에 변함없이 앉아있다. 우리가 새를 보기 위해 13개로 쪼개고, 그보다 더 많은 면으로 만들어진 프리즘을 들이댄다고 해도 검은 새는 오늘도 나무 위에 앉아서 그 검은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전 02화 내가 이사 나온 그곳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