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 은 Mar 14. 2019

시는 묘비명이다    

 필립 라킨의 시

니 부모가 널 망친거야.

그러고 싶어서 그러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돼.

자기들의 잘못을 그대로 너한테 물려주고

거기다 몇 개 덧붙이지, 그게 다 너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들도 그렇게 망가졌던 거야.

구닥다리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은 채

시간의 절반은 코를 훌쩍대며 근엄하게 굴고

나머지 시간엔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바보들 때문에.


인간은 인간에게 불행을 물려주는 법.

마치 해안가의 대륙붕처럼 푹 꺼져 들어가지

되도록이면 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와.

애는 낳지 말고.

  - 필립 라킨, <이것은 시-묘비명>(1971)


독서 매거진을 시작하는 첫 작품을 라킨의 시로 고르기까지는 망설이기는 했다. 이미 읽었을 테니 독자도 예상하겠지만 이 시는 그리 기분 좋은, 혹은 요즘 유행하는 '착한' 시가 아니다. 첫 행은 얼마나 도발적인지! 게다가 끝까지 그 도발성은 유지되다가 마지막 행에서 더 세게 후려친다. 뿐만 아니라 이 시의 제목에서 라킨은 이것이 바로 '시'라고 한다. 


라킨은 이런 착잡한 내용의 시를 1971년에 이미 써버렸다. 한국의 작가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어머니와 아버지에 바쳐지는 그 모든 시를 떠올려보라] 내용의 시를 50여 년 전에 쓴 것이다. 물론 미국 독자들도 이 시에 매우 화를 낸다. 어떤 이는 이 시가 싫다고 노골적으로 공개된 자신의 블로그에 쓰면서 조목조목 비판한다. 당연하다. 시는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났으니 어떻게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니, 당신이 어떻게 읽든 그건 알아서 하시라. 다만 이 시가 첫 행부터 우리의 마음을 후려치며 끝까지 읽게 하는 강렬한 충격효과만큼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이 시에 공감하든 화가 나든 말이다. 그리고 어쩐지 이 시가 요즘 한국의 미디어를 채우는 뉴스와 이야기들과 꽤 일목 상통하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그런 사회문화적 맥락은 일단 접어두고, 정말 이런 시도 시가 될까? 물어봐야겠다. 

이 시는 단지 부모를 향한 비난이 아니다. 그렇게 읽는 것은 일차원적이다. 그보다 심오하게, 부모를 빗대어 라킨이 전하는 주제는 시간이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게 되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어떤 본성과 그것에 의문을 던져보라는 것이다. 표면적인 시의 내용에서 부모가 자식을 망치고 또 그 자식이 자라서 부모가 되면 다시 그의 자식을 망치게 된다는 내용은 냉소와 유머를 섞은 어조로 세대와 세대를 걸쳐서 인간 존재가 갈수록 엉망이 되어가는 세태, 결코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암울한 전망, 진보와 발전 따위는 무의미한 구호일 뿐이라는 인식을 담는다. 그러니, '애는 낳지 말라'. 


이 시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시가 쓰인 시기, 즉 1970년대 초의 미국 상황을 떠올려야 한다. 모든 시, 특히 모든 훌륭한 시는 언제나 역사문화적 맥락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한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겪었다. 그전에는 1차 대전부터 시작한 세계전쟁과 한국전쟁 등의 국지전에 세계의 용병으로 참전했다. 수많은 자식들이 죽어나갔고, 60년대 말 히피문화와 반전운동, 시민권 운동과 학생운동 및  여성과 동성애 인권 등으로 문화적 대격변을 겪고 있었다. 이 변혁의 시대를 관통하는 여러 주제 중 하나가 부모세대에 대한 거부이다. 부모세대란 여기서 개별적인 부모를 포함한 그때까지의 자본주의 체제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니, '니 부모가 너를 망친 거다.' 

'너'를 비롯해서 '너의 부모'를 망친, 코를 훌쩍이며 [감상주의적으로 울면서] 구닥다리 모자와 코트를 입고 근엄한 척 굴다가도 서로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그들이란 바로 이 자본의 물욕과 위선적이며 값싼 동정과 연민의 체제 유지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사회규범과 관습에 순응하라고 근엄하게 설교하면서, 동시에 필요할 때는 욕심을 드러내고 경쟁에 뛰어든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 세대 간 '불행을 물려주는 법'이다. 
이렇게 세대와 세대를 걸쳐 불행을 유산으로 남기는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대륙붕처럼 점점 깊게 파여 가라앉고 있다. 어서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를 낳지 말고, 세대와 세대를 묶어둔 그 불행의 인연을 끊어버려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는 라킨이 자신의 어머니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쓴 것이다. 당시 라킨은 대학의 사서로 일하면서 휴일에는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시를 쓰던 때는 부활절 기간으로 추정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지내고 있었다. 상상해보라. 노모가 홀로 사는 집에 성인 아들이 가서 보름간 지내는 상황을. 소소한 갈등과 투닥거림, 짜증과 좌절감 등 부모와 자식 간의 그 흔한 드라마는 누구에게나 벌어진다.


 라킨 자신은 꽤 착실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규칙적으로 홀로 된 노모를 찾아가서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라킨의 아들로서 성실함은 인정해줄 만한다. 게다가 노모는 수시로 우울증에 빠졌다. 그렇게 어머니와 지내면서 라킨은 시인답게 부모와 자식 간의 그 복잡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관계를 탐색해 들어간다. 나 자신이 '나'가 되기까지 부모가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라킨의 아버지는 나치 독일을 지지했던 우익이었다고 한다. 라킨 자신도 종종 우익적 성향과 인종차별주의로 비난받기도 했다. 이 시에서처럼 라킨은 '니 부모가 널 망쳤다'라고 스스로에게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른다. 


시의 제목은 또 다른 시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레퀴엠>이란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저 광활한 별밤 아래

무덤을 파고 내가 죽으리니

기쁘게 살아왔듯이 기쁘게 죽으리라

그렇게 나는 기꺼이 누우리라. 


나를 위해 묘비명은 이렇게 써주길

"여기 이곳에 그가 있기를 원했으니

바다에서 돌아온 선원의 집이고

산골에서 돌아온 사냥꾼의 집이라."


이 시에서 '묘비명'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영어에서 verse, 즉 시 혹은 운문으로 쓴 텍스트라는 의미이다. 스티븐슨의 '시'가 죽은 후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묘비명이라면 라킨은 이 단어를 스티븐슨이 사용한 맥락에서 떼어내어 추모와 기억이 아니라, 분노와 좌절, 냉소와 비판을 담는다. 어떤 의미에선 라킨의 시도 죽음을 다룬다. 부모와 자식, 세대를 잇는 시간의 흐름은 죽음을 품고 있으니, 이 시는 라킨이 자신의 묘비명으로 쓰고 싶은 내용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의 제목은 이중적 의미를 담는다. 스티븐스의 시와 연관 없이 해석하면 '이것은 시다'이고, 스티븐스 시를 통해 해석하면 '이 시를 내 묘비명으로' 정도가 된다. 결국 시 한 편 한편은 묘비명이 아니겠는지. 


라킨은 독자에게 묻는다, 이 정도는 묘비명으로 써야 할 시대가 아니냐고. 그리고 이런 게 진짜 시가 아니냐고. 


독자, 이제 당신 차례다. 이게 시인가?




*시 번역: 강 은



이전 03화 현실의 프리즘, 언제나 하나 이상의 진실이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